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미신자들도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면… 본문
미신자들도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면…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마르 2,12
공동체에 ‘부부와 같은?’ 관계의 할아버지 신부님들이 계신다.
오랜 기간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해 왔고
그래서인지 서로 티격대격하면서도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위에서 언급한 바로 그대로 ‘부부와 같이’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듯 하다.
둘 중 한 분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친밀하다.
예를 들어 한쪽이 며칠 일정으로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면
나머지 한 분의 말 수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이 그래 보인다.
그런 두 분이 언제나처럼 아침 식탁 자리에서 티격태격하신다.
내용인 즉슨, 수도원 공동체에 속해 있는 ‘26성인기념성당’에서
복음 선교에 열심인 한 분 신부님이 결혼식 주례를 정례화 할 수 있기를 청한 것이다.
주일 미사가 없는 시간에 결혼식을 주례한다는 것에 의의를 제기할 일은 없겠으나
원장 신부님이 망설이는 것은 결혼식 주례 대상이 신자가 아닌 미신자들이기 때문이다.
일본 드라마에서 결혼식 장면이 나올때면 꼭 공식처럼 뒤따르는 장면이 있는데
웅장한 고딕 성당, 촛불이 켜진 성스런 제대 앞에서, 외국인 신부의 주례로,
아름다운 오르간 선율에 맞추어 신랑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호텔에서도 외면을 십자가와 종으로 장식한 결혼식장,
즉 성당으로 착각할 만하게 결혼식장을 지어 두고
근처의 성당에서 사목 중인 하얀 피부색의 사제에게 의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 딱 맞는 것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활동 왕성한 신부님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젊은 시절부터 평생을 본당 사제로서 사목하면서 시간이 허락할 때면
인근 호텔에서 치러지는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시곤 했단다.
그리고 그렇게 맺어진 쌍이 600쌍이 넘고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부부들이 있으며
또 그이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신부님을 찾아 오고 있단다.
미신자들의 성당 결혼식을 추진하자는 신부님 왈,
그이들이 미신자이긴 하지만 그렇게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세례를 받은 이들이 적지 않고
그래서 신부님이 계시던 본당에서 연례 행사처럼 가족들이 모임을 가졌으며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준 경우도 많았단다.
비록 세월이 흘러 그이들이 결혼식을 올렸던 예쁜 호텔 성당?은 문을 닫았지만
대신에 신부님이 계시는 성당을 자신의 고향처럼 여기며 지금도 모임을 하고 있단다.
그런 의미에서 미신자들의 성당에서의 결혼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지금의 결혼식 주례가 하느님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아닌가 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내일 모레면 90세를 바라보는 연세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해 오신 분이시기에
나가사키 새로이 이사온 공동체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시고자 청한 것이다.
한쪽 부부 역할을 하고 계시는 원장 신부님도 딱히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신에 결혼식을 올리고자 하는 부부들에게 3회 이상의 ‘혼인강좌’를 요구하셨고
그런 요구가 ‘미신자 결혼을 성당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할아버지 신부님의 입장에서는
“신자도 아닌 미신자들에게 3회 이상의 ‘혼인강좌’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지 말라’ 라는 이야기와 뭐가 다른가?”라며
이렇게 아침부터 티격태격 하신다.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맡고 있는 원장신부님의 요구는 물론
서운해 하는 할아버지 신부님의 하소연도 이해할 수도 있겠다.
결혼식 비용이 막대하게 드는 일본의 현 상황에서
둘이 하나가 되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픈 마음,
비록 아직 신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매년 안부를 묻고, 모임을 갖고
또 그렇게 깊어진 인연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전해 주려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인자한 할아버지 신부님을 알게 하려는 마음,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노력들이
이제껏 교회가 당연하게 요구했던 것들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보면
조금은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기존의 율법을 준수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힘있는 말씀과 권위 있는 행동에 대해서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며 감탄했듯이
우리 교회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배고픈 이들에게 먼저 빵을 나누고
그 후에 하느님의 말씀도 곁들여 전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하느님 선교의 한 방법이지는 않을까.
우리 교회가 더욱 지혜로울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나의 하느님 그분께 청해 본다.
지혜이신 하느님, 당신을 섬기는 이들이 더욱 지혜로울 수 있는 은총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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