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나의 희망 본문
오랜만에 글을 써 봅니다.
게으름인지 흥을 잃었는지 이렇게 빈 여백을 마주하는 것이 참으로 낯설 지경입니다.
아마도 그 동안 또 병이 도졌었나봅니다.
한 동안 새로운 말 배우느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뻬라 뻬라 입에 붙은 것도 아니고 여전히 말 문은 열리지도 않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밥 먹고 눈 뜨면 낯선 말 붙들고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그분도 제가 뭐라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을,
새로 배운 엉터리 말들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뭡니까.
아마도 하나, 둘 알아가는 배움의 즐거움에 또 그렇게 병이 도졌나 봅니다.
이런 중에 부활 성야 복음을 붙잡고 성당에 앉았다가 새록새록 올라 오는 것들이 있어
얼마간 뜸 했던 나눔 노트를 꺼내 봅니다.
‘두려워 말라’, '평안하냐?'
기도 초장부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콱’ 하고 가슴에 박힙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올라오는 질문은,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이지? 내가 두려워 할 것이 아직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얼 더 잃어 버릴 것이 있을까? 이미 그분의 ‘뜻’을 쫓아 살기로 서원했는데….
‘아버지의 뜻’ 이외에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어! 성공인가, 성취인가, 지위인가, 명예인가?
설마 지금에도 그분의 뜻 외에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아버지의 뜻’을 떠올리자 절로 ‘내가 지금 두려워 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
미리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분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지금까지’ 제가 찾아낸 답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일까? 질문해 봅니다.
아마도 ‘바르고 옳고 선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지요.
그리고 ‘그분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겠는지요?
바로 '성경에서, 예수님의 행적에서, 교회의 전승에서,
성인들의 삶과 교부들의 지혜 그리고 제 장상들과 선조들의 신앙을 이어 받은 벗들의 믿음이,
항상 그분의 뜻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배움을 좋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영원히 ‘학생’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 저는 오늘도 부지런히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묻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 우리가 ‘희망을 두고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향한 ‘믿음’이겠다 싶습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희망’과 같은, 아니 내 ‘목숨’과 같은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을 꾸역 꾸역 살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해 봅니다.
온 ‘희망’이 송두리째 뿌리 뽑혔는데도 아침이면 눈을 뜨고 밥 넘기게 하는 '그것'은...?
아마도, 그 ‘잃어버린 희망’ 뒤에 또 다른, 더 큰 ‘희망’이겠다 싶습니다.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겠다 싶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들이 그 '어떤 것'에 ‘희망’을 두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인인 제게 누군가가 그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 온다면
지금까지 제가 찾아낸 답으로 ‘저의 하느님!' 이라고 대답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라는 약속의 말씀처럼, 당신 아드님을 그 때문에 파견하셨듯이,
약함 투성이인 저의 죄에서 저를 구원해 주실 그분께, 저는 ‘희망’을 두겠습니다.
어떤 귀한 물건이나 사람까지도,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를 잃는 슬픔도 포용하는 ‘희망’,
내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희망’을 잃어 버렸들 때에도, 앞으로 나아가게끔 만드는 그 어떤 ‘희망’,
그 마지막에 놓인 것은 바로 ‘神’이 아닐까?
이렇게 저의 하느님께 제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제 ‘희망’일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분의 ‘뜻’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바르고 옳고 선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으렵니다.
제 식별과 선택의 기준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그분의 가르침에 기대어 매일 같이 그분께 ‘배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기를 청해 봅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여러분의 ‘두려움’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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