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천주교 신부 성추행, 성폭행 시도" 사건을 마주하며 본문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1코린 1,26-29).
인터넷 화면을 열자 첫 헤드라인 제목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천주교 신부 성추행, 성폭행 시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에 참담함과 슬픔이 올라오면서 한 동안 멍한 상태가 되었다.
법조계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사건 고발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미투(나도 당했다)운동’이 확산되면서 정치계, 문학계, 학계, 영화계, 음악계, 미술계 등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물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신과 세상을 속이며 살았는지 그 위선이 낱낱이 까발려졌다. 처음에는 피해자들의 외침에 너무도 뻔뻔하게 침묵, 변명, 부인으로 일관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던 그이들이 다른 피해자들이 실명을 대며 구체적인 증언을 더하자 하나 둘 ‘사죄와 책임과 자숙과 사퇴’를 입에 올리며 그제서야 잘못을 시인하는 모양새이다.
‘천사’의 지위를 누리던 유명인들이 하루 아침에 ‘성추행, 성폭행범’이라는 모욕과 멸시와 비참함을 맛 보는 ‘쓰레기’ 같은 처지로 전락한다는 것이 그이들을 침묵과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하게 했으리라.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태로 머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희미한 기억’ 운운하며 여론이 잠잠해 질 것을, 오히려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편이 더 많은 것으로 착각했으리라. 그러나 이내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형국임을 깨닫고, 이제는 그 어떠한 변명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받아 들이고 나서야 진정한 용서를 청하는 모습이다. 물론 어느 곳에서든지 여전히 뻔뻔스런 사람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차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성추행, 성폭력 천주교 관련 기사를 마주하니 이제는 종교계도 피해 갈 수는 없겠구나 라는 속 상함이 밀려 온 것이다.
일련의 사태를 지켠 본 어느 천주교 신자분이 “미투 운동으로 상처가 곯아 터지는 것들에 박수를 보내면서 동시에 이 일이 내가 속한 곳에서는 터지지 않기를, 그냥 터짐 없이 이런 일들을 보면서 자정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러면서 그런 자신의 이율 배반적인 모습에 속상함을 내비친 글에서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곪아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덜 아팠으면, 덜 상처 받았으면, 덜 부끄러웠으면 하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던 그이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살고픈 생존 본능이 이해가 되면서도 여전히 그 수많은 피해자들의 아픔과 슬픔과 공포와 절망 등에 먼저 공감하지 못함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여전히 ‘내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구나’ 싶어 이 꼬질꼬질한 모습에 이제는 속상해 할 기운도 없다.
다행히 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2/25일 사과문에서 “한 모 신부가 7년 전 남수단에서 행한 비참한 일에 대해 깊이 참회한다”며 “인간의 영혼을 어둡고 슬프게 만든 그의 폭력은 저희 사제단이 함께 매 맞고 벌 받을 일임을 인정하고, 기나긴 세월 남모르는 고통을 겪으신 피해 여성께 삼가 용서를 청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사제단의 한 모 신부는 엄연히 사제단의 일원이며 형제이므로 그의 죄는 고스란히 사제단의 죄”라고 고백하면서 “소식을 접하던 당시 정확한 사실과 피해자의 심정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점도 반성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지극히 부끄럽고 불행한 일이지만 이를 본분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고 수덕이라는 본연의 사명에 더욱 힘쓸 것과 교회 쇄신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사제단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수원교구의 교구장인 이용훈 주교 역시 2/25일 사과문에서 “교구장으로서 사제단을 잘 이끌지 못한 부덕의 소치로 이러한 사태가 벌어져 그동안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오신 피해 자매님과 가족들 그리고 교구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며 용서를 청했다.
더불어 “여성들이 자신의 인권과 존엄에 심각한 훼손을 일으킨 성폭력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고발함으로써…여성에 대한 부도덕한 행위가 밝혀 지고…(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맞서, 여성에 대한 그릇된 사회의식을 바로잡고자 용기를 낸 것”이라며, 특히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라고 강조 하면서 “이번 일을 거울 삼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바로 잡아 나갈 것”임을 약속했다.
동시에 “교구 사제단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공동 연대 책임을 지고 함께 회개하며, 올바른 사제상을 재정립하고 사제단의 쇄신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일 것을” 밝혔다.
‘휴~다행히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과 달리 교회의 어른들은 일체 변명없이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분연히 용기를 내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며, 차후로는 더는 그런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없도록 제도 개선에 힘쓰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하였다.
동시에 사과문 전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성추행과 성폭행을 시도했던 신부들이 ‘사제단의 일원’으로 그이들만의 잘못이 아닌 ‘형제 사제단 전체의 잘못임을 고백하고 공동 책임과 공동 회개’를 청하고 있다. 좋을 때만 형제가 아니라, 아프고 부끄럽고 쓰라릴 때 역시도 한 형제라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이들만의 잘못이 아닌 우리들 모두의 죄로서 고백을 하며 함께 용서를 청하고 그 부끄러움을 함께 느끼며 회개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추행을 하고 성폭행을 시도했던 신부들에게 절대 사제직을 그만 두게 해서는 안 된다. 옷을 벗는 것은 쉽다(?). 아니 도망치는 것은 쉽다. 그래서 세상의 시선처럼 ‘2~3일만 지나가면 이 모든 이슈가 잠잠해 질 것이니’라는 어이 없는 사태로, 실제로 그렇게 흘러 갈 수도 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 처럼...
아니! 결단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계속 ‘성추행 했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성폭행을 시도했던’ 신부여야 한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평생 간직하며 날마다 ‘주홍글씨’를 몸에 새기며 살아야 한다. 매일 같이 온 몸으로 모욕과 멸시여김과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평생 이 엄청난 잘못들을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 이제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그러나 오랜 세월 교회 공동체를 통해 치유 받을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고통을 우리 가해자 신부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옷을 벗는 것은 쉽다. 없었던 듯 세상 속에 파묻혀 잊혀져 버리기도 쉽다. 그러나 우리들은,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 고통 속에 살아 오신 분들이 마음을 추스려 다시금 살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그분들이 진정으로 용서를 해 주실 때까지, 교회를 신뢰하며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이 실망스러움으로 찢겨진 마음이 다시금 회복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를 청하고 또 청해야 한다. 형제의 죄는 우리의 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가 성서에서 ‘밀과 가라지 비유’(마태오13,24-30)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교회는 성인들로만 이루어진 교회가 아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 품 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성스러운 동시에 항상 정화되어야하며 회개와 쇄신을 끊임 없이 계속하는 것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8항).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구원, 즉 ‘구원이란 우리의 꼬질꼬질함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부끄러움을 안고서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지혜롭고 유력하고 가문이 좋아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으로 나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또 어떤 충격적인 사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더 비참한 상황과 마주할 수도 있겠고 그래서 더 실망하고 더 외면하고픈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이 가슴 아픈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건네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또 이 사건들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길 위에서의 모욕과 멸시여김을 우리는 더 생생하게 알아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미처 돌보지 못했던 아프고 가난하고 상처 받은 이들의 처지를 다시금 돌아 보게 될 것이고, 그래서 교회가 늘 그랬듯이, 이 비참함을 통해 하느님 뜻을 발견하고, 회개와 쇄신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 사순시기 우리 신자들은, 또 교회는 더욱 더 하느님께 매달리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죄 많은 신부들에게서 상처 받은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청한다. 그분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운 위로와 은총이 전해 지기를, 그래서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청해 본다.
주님! 당신 죄인들의 공동체에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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