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너도 힘드니? 나도 힘들다. 본문
1독서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말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단상
수도원에 살면서 '오해' 받는 일들이 있어서,
혹은 수도자로 살면서 '억울한 일'이 많다면 그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으리라.
아무리 옳게, 바르게, 성서의 말씀대로, 수도 생활 양식을 산다해도
주위 사람들에게서의 오해와 억울함이 계속해서 쌓이게 된다면 그래 보인다.
가끔씩 선배 예수회원과 후배 수사님들에게서
이렇게 '이해' 받지 못함에 대한 하소연을 듣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배운 바'대로 별 말 없이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듣는 것두 한 두번이지,
매번 만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괜히 하소연 해 오는 사람들이 내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기 전에
솔직하게 '그만 툴 툴 대'라고, '매번 같은 스토리가 지겹지도 않냐'고
'듣는 나도 힘이 빠진다'고, '그래서 여전히 그렇게 툴 툴 대서 바뀐 게 있냐'고,
'이제 툴 툴 대는 것 그만 두고 할 수 있는 걸 해'라며
아주 단호하게 말을 꺼낸다.
이러한 반응에 딱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화들짝' 놀라 스스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부류는 '화들짝' 놀랐다가 더욱 가까워지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이를 해칠 사람이나 적이 아니라
그이의 오해받음과 억울함에 함께 공감해 주는 사람임을 알아채면 후자의 관계가 되고
단호함에 상처를 받고 '왜 또 지랄이야!'라며 성찰하기 보다는 그 단호함에
지금껏 그랬듯 '오해 받고 있음'과 '억울함'이 먼저 생각나면
다시금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거나,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며 자기연민'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가끔씩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그이들을 떠나보내는 게 자기자신임을 모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이런 안타까움이 올라 온다.
여지껏 그렇게 툴 툴 대서 변한 게 많지 않다면 이제 그만 툴 툴 대는 것 그만 둘 것.
들어주는 사람들 다 떠나기 전에 얼른 무엇이 문제인지 그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 설 것.
마주 설 힘이 없다면 도움을 구할 것,
생각보다 주위에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믿어 볼 것.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께 당당히 청할 것(그동안 믿어온(?) 게 얼만데....)
즐기고(?) 있는 '자기연민'에서 얼른 빠져나올 것.
또 힘들다며 툴 툴 태는 '자기만' 아픈 후배 수사님께 정중하게 부탁한다.
'세상에는 너만 아픈 게 아니다'.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말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단상
수도원에 살면서 '오해' 받는 일들이 있어서,
혹은 수도자로 살면서 '억울한 일'이 많다면 그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으리라.
아무리 옳게, 바르게, 성서의 말씀대로, 수도 생활 양식을 산다해도
주위 사람들에게서의 오해와 억울함이 계속해서 쌓이게 된다면 그래 보인다.
가끔씩 선배 예수회원과 후배 수사님들에게서
이렇게 '이해' 받지 못함에 대한 하소연을 듣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배운 바'대로 별 말 없이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듣는 것두 한 두번이지,
매번 만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괜히 하소연 해 오는 사람들이 내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기 전에
솔직하게 '그만 툴 툴 대'라고, '매번 같은 스토리가 지겹지도 않냐'고
'듣는 나도 힘이 빠진다'고, '그래서 여전히 그렇게 툴 툴 대서 바뀐 게 있냐'고,
'이제 툴 툴 대는 것 그만 두고 할 수 있는 걸 해'라며
아주 단호하게 말을 꺼낸다.
이러한 반응에 딱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화들짝' 놀라 스스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부류는 '화들짝' 놀랐다가 더욱 가까워지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이를 해칠 사람이나 적이 아니라
그이의 오해받음과 억울함에 함께 공감해 주는 사람임을 알아채면 후자의 관계가 되고
단호함에 상처를 받고 '왜 또 지랄이야!'라며 성찰하기 보다는 그 단호함에
지금껏 그랬듯 '오해 받고 있음'과 '억울함'이 먼저 생각나면
다시금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거나,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며 자기연민'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가끔씩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그이들을 떠나보내는 게 자기자신임을 모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이런 안타까움이 올라 온다.
여지껏 그렇게 툴 툴 대서 변한 게 많지 않다면 이제 그만 툴 툴 대는 것 그만 둘 것.
들어주는 사람들 다 떠나기 전에 얼른 무엇이 문제인지 그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 설 것.
마주 설 힘이 없다면 도움을 구할 것,
생각보다 주위에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믿어 볼 것.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께 당당히 청할 것(그동안 믿어온(?) 게 얼만데....)
즐기고(?) 있는 '자기연민'에서 얼른 빠져나올 것.
또 힘들다며 툴 툴 태는 '자기만' 아픈 후배 수사님께 정중하게 부탁한다.
'세상에는 너만 아픈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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