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야옹아! 본문
1독서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복음말씀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단상
이웃살이에 새로이 한 식구가 된 이가 있다.
이름은 '야옹이', 봉사자가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가져다 놓았다.
고양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동기 수사님에게 키울 생각 없냐며 넌지시 물었다가
결사 반대를 외치는 내 대답에 서로 어떤 공모를 했는지
"형욱아, 이 새끼 고양이 우리가 키우지 않으면 동물보호소로 보내졌다가,
그래도 키우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안락사 시킨대"라며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수사님은 고양이의 '생명'을 운운한다.
한 발 물러선 대답으로 '밖에서 키우는 것은 괜찮지'라며
그때부터 고양이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아직 너무 어려서 밖에서 키우기 어렵다며 매일 열무국수 해 주겠다는 말에
당분간 어른 고양이가 되기까지는 사무실에서 키우게 되었다.
(근데 어른 고양이는 몇 개월이면 되나? 아님 수년이 걸리는 거 아닌가?
또 속았다는 느낌이....)
탄력을 받은 동기 수사님은 이름을 지어 주잖다.
해서 내 무성의한 작명센스로 '그냥 야옹이라 하죠'라는 대답에
궁시렁 궁시렁 더 말도 못하고 그때부터 참으로 평범한 '야옹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날리는 털에, 찢어발기는 티슈에, 시도때도 없이 올라오는 책상,
그리고 똥, 오줌 냄새며, 이리저리 정신 없게 장난을 치는 녀석 때문에
몇번이나 동기 수사님 가슴에 못을 박는다. "빨리 자라서 밖으로 나가라."
그럴 때면 하던 일도 멈추고 후다닥 야옹이 챙기기에 바쁜 동기 수사님이다.
마치 엄마라도 되는 듯이 얼르고, 치우고, 볼에 비비고, 놀아주는 모양이 그렇다.
그리고 소장님과 내가 한 마디씩 야옹이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면 의기소침해지는 수사님,
또 그것이 재미있어(?) 계속 맥없는 야옹이를 타박한다.
근데 야옹이와 놀아주는 내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다가오게 하려는 노력들과 은근 짓궃은 시도들이
(대체로 동기 수사님 표현으로는 '그만 괴롭혀'란다)
꽤 소소한 재미가 있다.
먹이를 주면서 새침하게 다가오지 않으려는 녀석에게 괜히 골이 나고
그래도 장난감을 흔들어 대며 그것에 자빠지고 바둥거리는 녀석이 꽤 귀엽기도 하다.
가끔은 책상 위에 올라와 꼬리를 말고 지 안방인양 앉아 있는 폼이 그렇고
내 의자 뒤 비좁은 곳에 자리를 차고 앉아 잠을 자는 모습이 그렇다.
무릎 위로 올라와 더워 죽겠는데도 혹시라도 녀석이 깰까봐 참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도 나고
이래저래 야옹이에 대해서 그이의 엄마 동기 수사님에게 불평을 하면서도
시시각각 이렇게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그녀석에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야옹이를 얼른 밖에 내놓자는 센터 소장님의 말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는 아들 예수를 보면서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이 그렇게 서운함으로 가 닿지 않았으리라.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모태에서부터 평생을 함께해 온 엄마 마리아에게는 오히려 그 말이 '더 큰 성장'의 증거로,
이 모든 인간적인 말들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랑스런 아들로 기억되리라.
믿음과 신뢰와 사랑은 함께 해 온 서로를 위한 시간과 노력과 인내의 결실임에 틀림없다.
그래 보인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복음말씀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단상
이웃살이에 새로이 한 식구가 된 이가 있다.
이름은 '야옹이', 봉사자가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가져다 놓았다.
고양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동기 수사님에게 키울 생각 없냐며 넌지시 물었다가
결사 반대를 외치는 내 대답에 서로 어떤 공모를 했는지
"형욱아, 이 새끼 고양이 우리가 키우지 않으면 동물보호소로 보내졌다가,
그래도 키우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안락사 시킨대"라며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수사님은 고양이의 '생명'을 운운한다.
한 발 물러선 대답으로 '밖에서 키우는 것은 괜찮지'라며
그때부터 고양이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아직 너무 어려서 밖에서 키우기 어렵다며 매일 열무국수 해 주겠다는 말에
당분간 어른 고양이가 되기까지는 사무실에서 키우게 되었다.
(근데 어른 고양이는 몇 개월이면 되나? 아님 수년이 걸리는 거 아닌가?
또 속았다는 느낌이....)
탄력을 받은 동기 수사님은 이름을 지어 주잖다.
해서 내 무성의한 작명센스로 '그냥 야옹이라 하죠'라는 대답에
궁시렁 궁시렁 더 말도 못하고 그때부터 참으로 평범한 '야옹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날리는 털에, 찢어발기는 티슈에, 시도때도 없이 올라오는 책상,
그리고 똥, 오줌 냄새며, 이리저리 정신 없게 장난을 치는 녀석 때문에
몇번이나 동기 수사님 가슴에 못을 박는다. "빨리 자라서 밖으로 나가라."
그럴 때면 하던 일도 멈추고 후다닥 야옹이 챙기기에 바쁜 동기 수사님이다.
마치 엄마라도 되는 듯이 얼르고, 치우고, 볼에 비비고, 놀아주는 모양이 그렇다.
그리고 소장님과 내가 한 마디씩 야옹이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면 의기소침해지는 수사님,
또 그것이 재미있어(?) 계속 맥없는 야옹이를 타박한다.
근데 야옹이와 놀아주는 내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다가오게 하려는 노력들과 은근 짓궃은 시도들이
(대체로 동기 수사님 표현으로는 '그만 괴롭혀'란다)
꽤 소소한 재미가 있다.
먹이를 주면서 새침하게 다가오지 않으려는 녀석에게 괜히 골이 나고
그래도 장난감을 흔들어 대며 그것에 자빠지고 바둥거리는 녀석이 꽤 귀엽기도 하다.
가끔은 책상 위에 올라와 꼬리를 말고 지 안방인양 앉아 있는 폼이 그렇고
내 의자 뒤 비좁은 곳에 자리를 차고 앉아 잠을 자는 모습이 그렇다.
무릎 위로 올라와 더워 죽겠는데도 혹시라도 녀석이 깰까봐 참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도 나고
이래저래 야옹이에 대해서 그이의 엄마 동기 수사님에게 불평을 하면서도
시시각각 이렇게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그녀석에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야옹이를 얼른 밖에 내놓자는 센터 소장님의 말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는 아들 예수를 보면서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이 그렇게 서운함으로 가 닿지 않았으리라.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모태에서부터 평생을 함께해 온 엄마 마리아에게는 오히려 그 말이 '더 큰 성장'의 증거로,
이 모든 인간적인 말들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랑스런 아들로 기억되리라.
믿음과 신뢰와 사랑은 함께 해 온 서로를 위한 시간과 노력과 인내의 결실임에 틀림없다.
그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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