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누군가의 조용한 죽음 본문
오늘 동료신부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52세. "너무 일찍" 이라는 말로 그의 죽음을 단정지을수 있을까? 하느님의 시간으로 하느님 당신이 바라는 충만함에 그 신부가 도달했음을 믿고 싶다.
"악성종양입니다" 라는 말을 들은지 몇개월이 되지 않았다. 그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나 자신은 그런 말을 들었을때 과연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 오늘 새벽에 이승의 생을 마친 그의 죽음은 "조용한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생각하면 커다란 눈이 떠오른다. 이 세상 살면서 맞닥뜨린 모든 상처받고 아픈 일들을 그저 그 크고 선한 눈을 껌벅껌벅이며 안으로 안으로 받아 들였으리라. "길어야 육개월입니다", "길어야 2-3개월입니다.", "길어야 몇주입니다", " 앞으로 3일 길면 1-2...주일입니다." 생명의 시한을 언도하는 의사을 말을 들으면서도 그 큰눈으로 그 말을 그저 순순히 받아 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상이야기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자꾸 좁혀만 오는 죽음의 문턱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감정의 굴곡을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그의 큰 눈은 그저 조용했습니다. 초연보다는 그저 순응에 가까운 선함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과거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수도 있겟지만, 삶의 끝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그가 "비틀거리면서도 가라앉지 않고 왔던" 삶의 여정의 결실을 보는 듯 합니다.
조용한 죽음. 그의 죽음은 저에게 그렇게 다가 옵니다. 하느님은 오늘 한 선한사람을 "일찍" 데려가셨습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더 많은 별들이 필요해서 일까요?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 것 같은 선한이들의 조용한 죽음, 그들의 영혼이 별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기를......
윤신부를 보내며.
윤신부님을 생각하며 동료 예수회원이 쓴 글입니다.
제가 일본에 온 뒤로 네 분의 선배 신부님들이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채준호, 박고영, 정일우 그리고 윤상용 신부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 뚝 뚝 흘리며 며칠을 심난해했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의 죽음 앞에서는 별 눈물 없이 조용히 기도로 배웅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같은 수도공동체이건만 함께 살며 온 몸으로 부대낀 이가 아니라면
또 그렇게 머리로밖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윤신부님과는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본 적도
그렇다고 함께 일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이렇게 다른 분의 추억에 기도를 더해 볼 뿐입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늘 사람들의 입술에 오르내리는 예수회원들의 삶,
그럼에도 늘 조용조용하던 윤신부님의 모습에서
수도회 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켜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 떠올려 봅니다.
아마도 이 세상 많은 삶들이 이렇듯 '조용한 삶'을 살다가
하느님 곁으로 떠나가느 듯 싶습니다.
그래 보입니다.
윤상용 요셉 신부님의 영혼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어머니와 가족들에게는 하느님의 위로가,
그리고 동료를 하느님 곁으로 보낸 예수회원들에게는
신부님의 '조용한 죽음'을 기억하며 더 많이 사랑하기를 청해 봅니다.
신부님 이 세상 삶 고생 하셨고 하느님 곁에서 사랑 많이 누리시고
이 땅의 모든 '조용한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청합니다.
함께 살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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