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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는 것들 본문

세상에게 말걸기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는 것들

해피제제 2019. 11. 6. 16:20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는 것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6;33

 

 

며칠 전 후쿠오카에 있는 수도공동체에 다녀왔다.

점점 적어지는 회원 수로 후쿠오카/나가사키 수도공동체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아직 그곳 회원들에게서 환영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가사키 공동체에 짐을 풀고 한 달이 훌쩍 지났기에

월 피정을 겸해서 인사를 다녀왔다.

 

 

후쿠오카 수도공동체는 소피아 후쿠오카 중/고등학교와 담을 두고 있다.

수도원 공동체 식당 창 밖으로 넓게 펼쳐진 학교 운동장에는

토요일 이른 아침 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클럽 활동을 하는 청소년들의 창창한 구호소리가 담을 넘어 수도원까지 찾아 든다.

 

이전에 학교에서 사도직을 했던 회원들이 꽤 많았기에 이곳은 환경이 근사한 편이다.

나가사키 공동체는 방이 다섯 뿐인데 이곳은 그 두 배가 넘는다.

공간도 널찍 널찍해서 어두침침한 나가사키 공동체는 아에 댈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이곳도 지금은 단 세 명의 예수회원만이 수도원을 지키고 있고

그 중 동년배의 일본인 수사가 선배 회원들을 돌보며 공동체 살림을 꾸려 가고 있다.

수도회가 후쿠오카에서도 철수할 날이 머지 않은 듯해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다.

 

 

환영회를 해 주겠다며 82세의 공동체 원장 신부님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하셨다.

고국의 스페인 요리 파에야와 해산물 아히오 스프를 정성껏 준비 해 주셨다.

91세의 일본인 수사님은 한국인 후배를 위해 가방을 메고 지팡이를 집고

또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내려가서 김치를 구해 오는 수고를 다 하셨다.

 

동갑내기 일본인 수사님은 전날 밤 인도네시아에서 막 돌아와서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일요일 새벽부터 근처 성당을 찾는 나를 위해 기꺼이 동행을 해 주었다.

맛난 아침과 커피 그리고 주교좌 성당을 비롯해 후쿠오카 시내 안내,

게다가 면류를 좋아하는 나에게 하카타 라멘까지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다음날 전화를 걸었더니 39.6 열이 솟는 감기에 걸렸단다.

괜히 미안해지려는 터에 오히려 내게 감기를 옮긴 것은 아닌지 그쪽에서 걱정을 해온다.

 

 

이렇게 공동체 형제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그이들이 준비해 준 파에야와 김치를 먹는 저녁 식탁 자리에는

반가운 손님을 한 명 더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도쿄에서 예수회 양로원공동체의 원장으로 계시는 신부님이 주인공이었다.

 

오랫동안 양로원공동체에서 선배 예수회원들을 돌보면서

이런저런 많은 체험들이 있었는지 우리들에게 잔잔한 나눔을 전해 주신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정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신다.

 

우리 예수회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며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평생을 걸쳐 이냐시오의 식별에 대해 훈련을 받는데

즉 가난과 부, 명예와 불명예, 장수와 단명, 건강과 병..등 등

그 어느 쪽도 치우치지 않는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섬기며

이웃 영혼의 구원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불편심indiference’을 염원하는데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더 이상 사도직을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

최고 장상인 관구장 신부님이 로욜라공동체(양로원공동체)’로 옮기세요 라고 명령하면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가기를 거부하는 회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지막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불편심이지 않을까라는 나눔이었다.

 

그래보인다.

지금 로욜라공동체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동도, 식사도, 씻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의 회원들이 머물고 있다.

 

고령화 된 수도회 사정으로 각각의 공동체에도 도움이 필요한 회원들이 많지만

로욜라공동체에 빈 방이 없기에 공동체 회원들이 그 역할들을 나누어 맡고 있다.

그런 중에 로욜라공동체에 머물던 회원이 선종을 하면

대기 중이었던 도움이 필요한 형제에게 양로원공동체로의 이동 명령이 내려지는데

그때마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단다.

즉 로욜라공동체는 삶의 마지막이라는 이미지로 한사코 가기를 거부한단다.

 

오랫동안 그곳의 원장으로 사도직을 하면서

그 중에는 전임 추기경, 전임 예수회 총장, 전임 관구장, 당대 세계적인 학자 등 등

다 방면에서 활약했던 예수회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대단했던 어느 형제회원들 역시도 최후에는 불편심앞에서 머뭇거린단다.

그러니 이냐시오 성인께서 회원들에게 불편심을 그리 강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때문인지 내가 살고 있는 나가사키공동체의 아직 왕성히 활약 중인

89세의 예수회원은, 당신은 이렇게 길 위에서 걷다가 죽겠다하신다.

그분에게도 로욜라공동체는 절대로 신세지고 싶지 않은 공동체인가보다.

그런 대선배 예수회원의 다짐을 듣게 되면서

나는 내 병들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에,

로욜라공동체로 가라는 명령을 겸손히 받아 들일 수 있을지….

길을 걷다가 죽겠다라는 귀여운 할아버지 예수회원처럼

나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그렇지 않기를, 명령을 내린 관구장 신부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를,

그럴 수 있기를 나의 하느님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청해 본다.

 

 

좋으신 하느님, 제가 당신께 가는 마지막 날들을 잘 준비할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