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사랑이 식는 것인가? 본문
사랑이 식는 것인가?
“신부님! 어디 안 나가세요?”
스페인으로 일본으로 파견 받았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왔는데도
밥 시간이 되면 꼭 꼭 자리를 지키는 내 모습을 보고
후배 수사님이 ‘그렇게 갈 데가 없냐(?)’는 듯이 말을 걸어 온다.
그러고 보니 어디 마땅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부모님은 뭐 그리 급하셨는지 서둘러 하늘 나라로 떠나셨고
손주들을 키우셨던 할머니 마저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그분들 곁으로 가셨으니
이제 ‘본가’라고는 남아 있지 않다.
시골(?)에 큰고모님과 누님 가족이 살고 있지만
‘조카 신부님이 왔다’며 80이 되신 할머니(?)가 쉴 틈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도 부담스럽고
누님과 동생의 아들과 딸들이 엉겨붙는 것도 어느 때부턴가 몸이 부대껴
조카들을 이용(?)해 ‘자고 가라’며 붙잡는 것도 손사래 치며 뿌리치고
누님 댁이 건 동생 집이건 가족들과 밥만 먹고 의무를 다한 듯 자리를 뜬다.
어느 순간부터 내 집, 내가 머무는 수도원이어야 마음이 편하다.
사람도 그렇다.
언제 부턴가 그 좋아하던 벗들과 신자분들과의 만남도 소원하다.
몇 년씩 해외로 떠돌다 보니 ‘나 좋다’고 따라 다니던 팬(?)들도
하나 둘 당신들 삶에 쫓기듯 살아 가게 되고
그렇게 하나 둘 연락이 뜸하게 되더니
바뀐 전화 번호며 모바일 전화기 속에 그이들의 번호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한국에서 지낸 지난 3주 동안 가족을 빼고 만난 이가 단 둘이니
후배 수사님의 의아한 물음도 이해를 할 만 하다.
나도 그 수사님의 질문에 ‘그러게!’ 라고 싶어 가만히 성찰해 보면서
‘벗들에 대한, 신자분들에 대한 내 사랑이 식었나?’ 싶기도 했다가
그이들을 위해 문득 문득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안 보고 싶은 것도 않이니 사랑이 식었다고 말 할 수도 없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지난 번 나랑 두 번째 밥을 먹게 된 벗의 경쾌한 답변이 떠오른다.
“신부님, 신부님이 나이 들어서 그런 거에요”
그러면서 내가 덧붙이기를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8시도 안 되었는데도 왜 그리 졸린지 모르겠다’고
또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도 다시 ‘졸립다’고 하면서
‘“잠 자는 숲 속의 공주”도 아닌데 갑자기 잠 귀신이 붙은 것 같다’라는 변명에
‘해외에서의 공부의 스트레스와 긴장이 오랜만의 고국행에 풀려서 그렇다’라며
‘당분간은 수도원에서 많이 자고 많이 먹고 많이 쉬는 것이 좋겠다’는 해석을 내려 준다.
그래 보인다.
절대로 네버, 벗과 신자분들에 대한 내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다.
모두 ‘나이를 먹은 탓’이오, ‘긴장이 풀린 탓’이다.
그러니 어여 기운을 차려 다시금 예전의 내 기운찬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해외에서 쌓였던 긴장’은 쉬면서 풀어 지는 것은 당연할텐데
이미 먹은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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