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산상수훈의 ‘행복한 사람들’에 대한 단상 본문
산상수훈의 ‘행복한 사람들’에 대한 단상
신학원 공동체 미사 주례에 딱 강론까지 겹쳤다.
오랜만에 방문해서 마음 편히 먹고 놀며(?) 손님처럼 머물러 있다가
갑자기 빵꾸가 난 공동체 미사에 땜빵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오늘 복음말씀이 예수님의 산 위에서의 ‘행복선언’이다.
또 공교로운 것은 나는 이 ‘행복하여라’의 가르침을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그분께 새롭게 배워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 일명 ‘까미노’는 두 종류의 순례 증명서를 발급한다.
하나는 ‘스포츠용’, 그리고 또 하나는 ‘종교용’이다.
예수의 제자 야고보 성인(산티아고)이 묻혀있는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 무덤은
옛 적 예수의 제자 성 야고보의 무덤을 찾는 성지 순례의 의미와 함께
종교적인 색채를 걷어 낸, 현대의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요구가 더해진
즉 익스트림 스포츠의 한 분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대체로 기성종교를 떠난 현대의 유럽사람들이 ‘스포츠용’으로 증명서를 받아 가고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에서 한 참이나 떨어진 한국사람들이
‘종교용’ 순례 증명서를 받아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까미노를 하며 만났던 몇 몇 한국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 등 등
유럽사람들의 ‘즐기기 위한 까미노’ 보다는 ‘성찰을 위한 까미노’로
좀 더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순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날 까미노 순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니키라는 한국인 순례자가 나에게 물었다.
“신부님, 나는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내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까미노를 걷기로 결정을 하고 한국을 떠나 왔지만
생각은 커녕, 매일 매일 몸은 천근만근이요,
발바닥은 몇 번이나 물집이 생겨 걷기도 힘들 정도고
게다가 무릎이 아파 내리막길에서는 옆으로 걸어야만 합니다.
또 매일 밤 잠자리를 찾아야 하는 고생스러움과
매 순간 어느 길로 가야할지 불안함 속에 선택해야 할 때는
이 길이 맞는지, 혹 지나친 것은 아닌지,
‘노란화살표’와 ‘조개껍데기’ 표식은 정확한지 등 등 매 순간 갈등의 연속 입니다.
성격이 내성적인데다가 몸집도 왜소해서
까미노를 혼자 걷지도 못하고 누군가의 뒤를 따르거나 동행을 하곤 하는데
그것도 그쪽에서 말을 걸어 주어야 겨우 조심스레 대꾸를 하고
그 전까지는 마음 속에서 옥신각신하는 내 모습이 참으로 한심할 지경입니다.
까미노를 홀로 걷기로 했으면서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는 내 모습이
참으로 저를 비참하게 합니다.
이런 내 모습을 매일같이 마주하면서
내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왜 이 길을 왜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요?”
나는 니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니키씨, 니키씨는 지금, 집 앞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 앞 슈퍼마켓을 갈 때는 부시시한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 써도 되고
화장 없는 맨 얼굴로 그냥 나가도 됩니다.
깔끔한 구두가 아닌 슬리퍼를 질 질 끌고 갈 수도 있고
회사에 출근할 때의 말끔한 정장이 아닌 추리링을 걸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듯 집 앞 슈퍼마켓은 아무런 준비가 필요 없는 내 익숙한 ‘나와바리’입니다.
그런데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전혀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15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날라가야 하는 낯선 곳,
까미노를 하기 위해 매일 걸어야 할 낯선 길과 머물러야 할 알베르게
어디에서 잘 지 또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매 순간 머리를 싸매고 결정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내 집 앞 익숙한 슈퍼마켓을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낯선 새로운 모험을 떠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몸의 천근만근, 발바닥의 물집, 무릎의 고통,
매일의 고단함, 선택의 두려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 입에 맞지 않은 음식,
낯선 알베르게에서 잠든 순례자들의 코골이 소음 등 등
이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내 익숙한 나와바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그랫듯이
수십 번 넘어지고 자빠지고 부딪치고 까지면서
어느 순간 드디어 자전거 타기에 성공한 그 때처럼,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물에 뜰 수도 없었고,
자꾸 몸이 가라 앉아 버려, 입으로 코로 먹은 물이 한 트럭(?) 였듯이
또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손가락이 저리고, 어깨가 결리고
굽어지는 허리에 선생님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곧추세웠듯이
그리고도 간단한 ‘도레미…’를 수십수백번 반복했듯이
우리의 모든 배움은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두렵고 망설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니 니키씨가 나에게 ‘내가 잘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네, 물론이지요. 니키씨는 지금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해 줄 것입니다.”
나는 니키씨와의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의 ‘행복한 사람’에 대한 가르침을
조금은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세상 살이에 마음이 괴롭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지금 세상의 부조리에 가난하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지금 아픈 이들 때문에 슬프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지금 불의한 세상을 위해 싸우느라 박해 받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지금 위로하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애쓰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지금 작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느라 힘겹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지금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지치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지금 여전히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지만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당신은 지금 너무도 잘 하고 있다.
그러니 머지 않은 곳, 앞에 놓일 열매를 희망하며
이 힘듦, 이 고됨, 이 지침, 이 두려움, 이 불안에
조용히 웃음지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그럴 수 있기를 나의 하느님 그분의 도움을 청해 본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12; 루카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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