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영성신학 박사 학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본문
‘영성신학 박사 학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En todo amar y servir: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를 수 있기를...’ (Ex 363)
동료 형제와 산책을 나섰다가 자신이 ‘영성신학’을 공부하게 된 사연을 들려 준다.
형제는 앞으로의 교회의 역할이 더는 어떤 ‘활동’ 중심의 사목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학교, 병원, 이주민 센터와 같은 각종 센터, 복지기관, 유치원 등 등 정부에서 모두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교회가 일정 부분 담당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정부가 충분히 사회 복지 부분에 예산과 정책을 반영하고 있고 일반 기업과 개인 단체들이 해당 영역의 활동을 종교 기관 보다 더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기에 교회가 더 이상 해당 영역들을 담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형제는 그런 현상들을 지켜 보면서 ‘그렇다면 종교는 앞으로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까?’ 를 계속해서 고민했고 그래서 종교 본연의 정신인 형제가 소속된 수도회 영성을 연구하여 교회의 영성에 깊이를 더하고, 사회에는 정신적인 영역에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수도회 장상에게 청원을 드렸고, 결국 먼 곳 영적인 기운이 충만한 스페인에까지 유학을 오게 된 것이다.
형제의 나눔에 귀를 기울이면서 전적으로 그 의견에 틀린 부분이 없기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의 의견처럼 교회에서 운영하는 모든 기관에 활동의 뿌리 역할을 담당하는 교회의 영적인 기운이 없다면 그 활동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세상에서 같은 기관을 운영하는 다른 단체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종교 기관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은 기본적으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 아니다. 성경의 하느님 말씀, 예수가 이 땅에서 몸소 살았던 삶을 여러 구체적 활동을 통해 이 사회에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영적인 자산들을 가지고 해당 기관들을 운영한다면 교회 내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성 운동과 비교해서 더 넓게 교회 밖 세상을 향해 교회의 정신과 영적인 보물들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형제의 ‘활동’을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결이 다른’ 느낌이다. 그렇지만 형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해했기에 재차 묻기를 그만 두었다. 형제는 오늘날 교회가 운영하는 각종 기관들이 교회의 영적인 정신을 잃어 버린 채 일반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을 그대로 좇아 가고 있다고 걱정스러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별 차별이 없을 바에는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교회의 영적인 가치들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더 심화해서 교회의 좋은 보물들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형제의 말 마디 속에서 읽혀 진다.
형제의 속 깊은 생각에 공감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조금은 결이 다른’ 시각이 있다고 보는 것이, 형제의 나눔에는 교회 본연의 영성을 심화하고 연구해서 그것을 누구를 ‘대상’으로, 또 어떠한 ‘장’에서 펼치겠다는 것인지 질문이 올라오게 한다. 형제의 의도와 달리 내쪽에서 오해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영성을 혹여 ‘교회 내 신자’를 대상으로 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또 말 그대로 ‘교회 내’ 혹은 ‘교회를 찾아 오는 사람들’에 한정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형제의 나눔 처럼 가톨릭 영성으로 운영되는 일반 기관들에서 그 정신을 구현해서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운영하지 않는만 못하다. 그렇지만 이런 정신 구현의 장들에서 전부 손을 떼고 철수한다면 이제껏 애써 발굴하고 연구했던 영성들을 어느 장에서 발휘될 수 있겠는가. 결국 그 좋은 정신들은 교회 내에서 밖에 구현할 수 없겠으며, 천주교 신자들 대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세상의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가톨릭 영성을 알고 싶다고 구름처럼 성당이나 영성 강연장으로 몰려 들 것이며, 생전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피정이란 영적 체험을 위해 전국 피정집을 찾아 발걸음을 하겠는가.
조금은 결이 다른 내 생각으로는, 세상이 아무리 세속화 되었고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관들이 그 세속화의 경쟁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톨릭 정신을 구현하여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들을 굳이 철수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가톨릭 영성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세속의 그 어떤 것 보다도 더 큰 정신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최전선에서 전할 수 있는 장이 그곳들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에서 우리 고유의 정신들이 약화되었다면 오히려 더 반성하고 쇄신하여 영적인 가치들이 활발하게 꽃 피울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른 것에 우선하는 해결책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가 이 세상에 파견되어 실행했던 진짜 미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그분 나라의 실현의 구체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같은 병원이면 가톨릭 병원을 선호하고, 같은 양로원이라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양로원을 택하고, 같은 학교라면 가톨릭 정신으로 운영하는 교육 기관들을 선택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세상의 이치다(너무 자기 본위의 생각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할 이도 있겠지만 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교회에서 가치를 두고 있는 옳은 것, 바른 것, 선하고 정의로운 것 등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거듭 강조하지만 신자 아닌 이들이 가톨릭 정신과 영성들을 체험하는 곳은 고요한 피정집이 아닌 세상 속 수많은 가톨릭 정신으로 운영되는 기관들에서이다.
솔직히 인정한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의 가톨릭 정신과 영성이 현실의 각종 기관의 순위 경쟁에 내몰려 처음 보다 많이 퇴색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학교 교육 사도직에 종사는 수도성직자들은 더 본연의 영성을 몸에 새기고 사도직에 임하길 기도 드린다. 사회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성직자들은 좀 더 본연의 영성을 몸에 새기고 현장에서 활동하기를 기도 드린다. 영성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성직자들은 좀 더 가톨릭 본연의 영성을 발견하고 연구하는데 힘을 쏟기를 기도 드린다. 그리고 해외 선교에 종사하는 수도성직자들 역시 해당 영성으로 확실히 무장하고 선교를 떠나길 기도 드린다.
그래 보인다 교회의 영성은 처음부터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들을 우리 수도성직자들이 몸에 두르거나 깊게 새기지 못해서 각 사도직장에서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이 세상의 기관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역시나 문제는 영성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들 사도직 종사자들의 현장에서의 가톨릭 영성 부족이 문제 였다. 그러니 먼저 그것들에 반성을 하고 이후 해결책을 찾으면 될 일이다. 이미 존재하는 가톨릭 고유한 영성을 우리 몸과 삶에 새기면 될 일이다. 그럴 수 있기를 청해 본다.
다행이다. 우리 모두가 영성신학 박사 학위를 할 필요가 없어서...
주님, 저희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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