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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왜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죠?" 본문

세상에게 말걸기

"왜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죠?"

해피제제 2018. 3. 23. 11:10

왜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죠?”




" 어이 이봐! 그런 어려운 질문은 나에게는 하지마. 다른 지혜로운 분들을 찾아봐. 나도 지금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니까"



어느 날 삶이 버겁다며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지' 질문을 던져 오는 이가 있어 '그런 문제는 더 지혜로운 이를 찾아 가세요'라고 대꾸했다가 계속해서 그 물음이 마음에 걸려 결국 내가 생각하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 들을 두서 없이 나누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고통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 오는 방식이라고 생각해. 세상 모든 것들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 오듯이, ‘고통역시 하느님의 한 가지 의사 소통 방식이라고...



인간은 통상 어떤 것은 좋은 것’, 또 어떤 것은 나쁜 것이라고 구분을 짓고 대하지. 예를 들어, , 명예, 지위, 권력, 오래 사는 것 등과 같은 것은 좋은 것으로. 반면에 가난, , 불명예, ‘고통과 같은 것은 나쁜 것이라고 마음대로 이름 붙여놨지. 그래서 나쁜 것은 내 삶에서 평생 피했으면 하고 바라며 살게 되지. 하지만 고통과 같은 것은 우리 삶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것 또한 현실이잖아. 싫든 좋든 나쁜 것은 더 잘 경험하고 사는 듯 말이야.



이렇듯 우리는 늘상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경험을 하고 사는데, 우리의 사부 이냐시오 성인은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어떤 것이라고 말씀 하셨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인간사에서 그냥 매일 반복처럼 일어나는 어떤 것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것들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치 중립적인 것들이라면 이해하기 쉬울까.



예를 들어, ‘그 자체를 놓고 보면 그것은 좋은 것나쁜 것도 아니라는 말이지. 그것을 이쪽에서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것도 될 수 있고, ‘나쁜 것도 될 수 있다는 뜻이야. 돈의 노예가 되어 삶 전체를 온통 돈 버는 데에만 올인해서 살게 되면 그 삶이 행복할까. '수전노'라는 말이'나 이야기 책의 '놀부'나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 대표적인 예지. 반면에 유일한 박사'와 같은 분은 자식들에게도 유산을 남기지 않고 모두 사회에 기부를 해 버렸지. 그러니 자식들이 ?’ 무슨 대기업의 형제처럼 유산 분쟁 따위로 서로 치고 박고 의() 상할 이유도 없고, 그런 아버지의 뒷 모습을 보며 자랐으니 돈을 대하는 마음도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으로 대하면서 살지는 않겠지. 전자는 가치중립적나쁜 것으로 작용한 예고, 후자는 모든 이에게 평생 교훈이 된 좋은사례지. 이냐시오 성인이 이야기 하고 싶으셨던 것은 이쪽에서 세상의 것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어. 세상의 모든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치중립적인 것들이라고...  



, 다시 고통의 문제로 돌아가서, 이제부터 중요한데, 그냥 어떤 것이 매일 반복처럼 우리에게 일어날 때, 우리가 그 순간 그것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때부터 천차만별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사례를 들어 말해 볼까.   



예를 들어, 어느날 나에게도 피하고 싶은 고통이 찾아 온 적이 있었고,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이게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정도로 고통스럽기는 했지. 하지만 그 후 내가 그 고통을 앞에 두고 취한 선택들로 지금 내 삶을 전체적으로 펼쳐 놓고 보면 반드시 불행한 결론으로 이끌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즉 그 고통스런 사건을 통해서 나는 친구들을 만났고, 도움을 받았고, 새로운 선택을 통해 수많은 경험을 했고 그래서 결국 지금의 삶으로 이끌어졌지. 그렇기에 매번 고통이 찾아 왔을 때 그것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그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체험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중이지.



이렇듯 하느님께서 세상의 하고 많은 의사 소통 방식 중 이쪽에서 가장 피하고픈 고통이라는 방법으로 말을 걸어 오셨을 때, 내 쪽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꾸하느냐에 따라 고통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어.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고통이란,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삶의 방식에서 또 다른 쪽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 또 다시 고통이 내 삶에 찾아 왔을 때는, ‘왔구나 고통.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떤 선택을 하면 될까?’를 고민하게 되지. 물론 그때도 혼자 고민하지는 않아. 주위에는 멋진 친구들과 지혜로운 어른들도 많고, 또 내게는 무엇보다도 든든한 하느님이라는 빽이 있거든. 아무튼 고통그것에 붙잡혀 살기에는 내가 조금은 더 똑똑해졌다면 너무 자기 자랑이려나.


언젠가 더 지혜로워지고 더 어른이 되면 '고통'에 대한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내 수양은 여기까지라서 친구가 내 말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고 그렇지 않다면 버리면 될 일이지. 그렇지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은, 친구 역시 이 '고통'이라는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지금 친구에게 닥친 고통스런 사건을 통해서 진지하게 질문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 나도 기도 중에 친구와 함께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