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쳥년이 사라져 가는 교회, 희망이 사라져 가는 교회 본문
청년이 사라져 가는 교회, 희망이 사라져 가는 교회
마르 11:15-17: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 가 거기에서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하고 나무라셨다.
서울교구의 한 본당에서 1년 남짓 보좌 실습을 하면서 청·소년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주일 ‘어린이 미사’에 참석하는 아이들이 60-70명 그에 비하면 청년 미사는 이름만 ‘청년 미사’이지 참석하는 청년들이야 20여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주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시간 청년 미사에 참석하는 어른 신자가 대부분이었다.
본당의 주임 신부님과 청년 사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점차 고령화 되어 가는 한국 천주교 교회 현실에서 어른들에 대한 사목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고 있고 그에 비해 현실에 맞는 청년들과 중년들에 대한 프로그램이 부족하여 좀 더 교구 차원에서 원인을 분석 하고 전략과 예산을 집중하여 청년 사목 활성화에 힘을 쏟았으면 하신다. 일선 본당들이 홀로 대책 마련 하기에는 이미 현실 상황이 녹록치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날 주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청년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이들에게 직접 물어 보았다. “왜 성당에서 청년들을 찾아 보기가 힘들까요?”
이런 저런 이유들을 토로해 온다. 개인이 생각하는 원인 분석이지만 대체로 공통되는 의견들이 있으니 틀림없이 청년들이 얘기해 준 것들을 통해 원인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첫째, ‘재미가 없다.’ 처음부터 ‘재미’라는 말에 “교회가 ‘재미’를 찾는 곳인가?”라며 의문을 표할 분들이 계시겠지만 하느님을 알고 신앙에 맛들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린다. 어떤 계기로 개인적인 흥미가 동해야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후 성당 내에서 계속적인 미사 참례와 신앙활동을 통해서 어느 순간 하느님을 깊게 체험하게 되면서, 그분을 사랑하고 또 내쪽에서 그분을 따르기를 청하는 신앙 여정이다. 처음부터 열심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청년이 성당을 다니기에 따라 다니기도 하고, 보좌 신부님이 잘 생겨서 괜히 주일학교 교사단을 지원하기도 한다. 여름 캠프라는 것도 성당을 통해서 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고, 함께 모여 부활 달걀을 만드는 일 등 성당 내의 작은 활동들에 소소한 재미를 붙이면서부터 발 걸음이 현재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도 그랬다. 부모님 그리고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에는 주위 모두가 똑같은 형편에 별로 풍족하지도, 재미난 것들도 쉽게 찾아 볼 수 없었지만, 동네의 성당에 가면 파란 눈의 신부님과 천사 같은 수녀님과의 만남으로 우정, 존경, 사랑을 통해 어른이 되어 갔고, 게다가 똑 같은 처지로 모여든 친구들이 많았기에 그이들과의 캠프를 기획하고 행사를 진행 하면서 함께 재미를 추구하고 우정을 쌓아 갔다. 성당은 늘 그렇게 청·소년들에게 처음 보는 놀이기구 처럼 신기해할 것들이 많았던 호기심 천국이었다.
그런데 현대의 청년들은 이미 컴퓨터가 보급된 사회에서 태어났고, 부모님 세대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것들을 누리면서 자랐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하여 스스로가 세계 곳곳을 서핑하며 ‘더’ 재미난 것들을 찾아 낼 수 있고 또 그것을 보며 자신만의 꿈을 좇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인 재미나 새로움을 제공할 수 있는 역할은 이미 끝난 듯 하며, 오히려 세상을 따라가는 속도가 더 느려 보인다는 것이다. 덧붙여 ‘재미가 없는 곳’이니 친구들이 모일 리가 없고, 그래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려면 성당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 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와 ‘재미’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재미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교회만의 ‘재미’를 제공하는 데에 우리가 좀 더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둘째, ‘청년들이 교회에서 할 역할이 없다.’ 과거 대학생들이 청년활동을 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거나 하면 아이들에게는 작은 존경과 감사를 받을 수 있었고, 어른 신자들로부터는 인정과 칭찬으로 봉사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이 귀했던 시대라 사제들 역시 그이들의 의견에 얼마만큼은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청년들은 본당 활동을 통해 자기 계발을 통한 성취감과 신앙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섬김과 헌신으로 인간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이런저런 조기교육으로 더 똑똑해진 아이들, 고급 교육을 받은 엄마들의 주일학교 교사들에데 대한 무리한 요구와 무시 그리고 때로는 비인격적인 태도로 청년들은 사기가 꺾인다. 게다가 ‘이미 내가 그 전에 해 봤는대’로 시작되는 어른 신자들의 아이 취급하는 언행들, 교사단이 중지를 모아 제출한 기획을 두고 사제들의 단칼에 잘라내는 일방적인 사목 방침이 거듭 되풀이 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본당 활동을 하는 청년들에게는 ‘그냥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 라는 무언의 명령이, 교회가 함께 동반할 협력자를 원하는 것이 아닌 단순 봉사자들만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점점 본당을 떠나게 된다. 이래저래 청년들의 있을 곳이 더 좁아지는 현실이다.
셋째, 현실의 치열한 상황들이 성당에 나갈 수 없게 만든다. 과거에는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어디든지 일자리가 있었다. 전공은 물론이고 전공과 관련 없는 업종에도 쉽게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청년들은 학과 공부 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도 하고 연애도 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당에도 봉사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청년들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위한 전쟁터로 내몰려 학과 공부 외에 없는 시간을 짜내어 한 가지라도 더 스펙을 쌓아야 하는 엄혹한 현실에 살고 있다. 토익·토플, 회계사, 금융상담사, 컴퓨터 관련 자격증, 영어 이외의 외국어, 배낭여행 등 등 대여섯 가지 스펙들을 사비를 들여 취득해야 한다. 자신의 전공이나 좋아 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모두가 스펙을 쌓고 있으니 자신도 따라 여러 종류의 스펙을 쌓아야 한다. 게다가 전공이 하나여도 힘에 겨울 판에, 두 개, 세 개씩 복수 전공을 하고 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청년들이 성당에서 활동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미사만 참석해도 고마워해야 할 형편이다. 성당 내에서 청년들이 없다고 비판 할 수만도는 없는 참으로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넷째,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 과거 교회는 희망이 꿈틀대는 곳이었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가진 것 없는 교회이지만 그래도 희망 하나 만은 늘 반짝 반짝 빛나는 곳이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천주교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명동성당’이 생각났고, 군사정권의 그 엄혹한 시대에도 ‘나를 맨 먼저 짓밟고 가야 할 것’ 이라며 일성을 내지르는 교회의 큰 어른을 누구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하얀 제의를 입은 신부님들이 있었고, 또 그 뒤를 이어 수녀님들과 신자들이 가로 막아 빼앗기고, 억압 받고,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어 명동성당까지 떼밀려 온 아픈 이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곳은 이 땅의 ‘민주주의의 성지’였고, 그래서 늘 들머리는 아프고 상처 받은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명동성당은 세상이 모두 나를 죄인 취급하더라도 그래도 단 한 곳 내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희망의 자리’인 ‘명동성당 들머리’는 오늘 어떠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가.
청년들은 누구 보다도 빨리 교회 안에서 희망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아 챘다. 그이들이 닮고 싶은 존경할 어른이 이 교회에 존재하는지, 사제들의 말에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재빨리 알아 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의 등장으로 세계가 가톨릭을 바라 보는 시선이 바뀌었듯이, 교회 내 사제들은 옳고 의롭고 바르고 선한 것들을 강론대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따르는 예수처럼 가난하고 겸손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며 그들의 온 삶으로 보여 주었다. 사제들의 말에는 늘 힘과 희망이 서려 있었다.
반면, 오늘날 교회의 어른들과 사제들의 삶을 보면서 청년들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 세상의 가치들, 부 명예 권력 등을 그대로 교회 내에 들여와서,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 교회에 발걸음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사제들 스스로가 생기 넘치는 하느님 말씀을 죽은 문자 취급하는데 가슴 뜨거운 청년들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다.
청년들도 안다. 예수가 단 한 번도 천주교 신자들과 어울린 적이 없다는 것을. 예수는 지붕이 있는 멋진 건물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예수는 늘 길 위에서 사셨다는 것을.
사제가 매일 새벽에 일어나 큰 존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기도하는 삶은 존경스럽다. 그렇게 써내려진 묵상글이 책으로 엮어져 신자들에게 읽히면 교회에 이 보다 더 큰 보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교회의 큰 어른들이 매일 기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혼신의 힘을 다해 신학서를 저술했다고, 몇 달 간격으로 기도 묵상집을 펴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 연구와 기도의 시간 이외에도 그분들에게 맡겨진 또 다른 역할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예수가 항상 길 위에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이 사회에 공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불의가 충돌할 때, 교회는 분연히 일어나 세상의 불의와 부정의를 준엄하게 꾸짖어 왔다. 세상의 불의에 신음하는 아프고 상처 받고 위로가 필요한 이드을 찾아가 곁을 지켜 주었고, 위로를 건네며 또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연대하며 불의에 맞섰다. 그이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하느님의 희망을 교회는 온 몸으로 전했다.
예수는 지붕을 가진 공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 산으로 들로 이 마을 저 마을로 당신을 좇아 어디든 따라나서는 군중들을 위로하고 귀를 기울여 주고, 함께 먹고 마시며 하느님의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이 교회의 공적 기능을 잊는다면 교회는 ‘게토’에 갇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세우고 자신들만의 안전을 도모하며 살게 될 것이다.
청년들은 누구 보다 먼저 교회의 변화에 민감히 반응한다.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지 관저에서 나오지 않는 전임 대통령처럼, 울부짖고 신음하고 살려 달라는 외침을 외면한 이름 뿐인 이 땅의 어른들에 청년들은 절망한다. 그런 이들이 교회의 어른으로, 또 그 주위에는 우 수석 같은 인물들만 가득하다면 청년들이 당연히 교회로 발길을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전임 대통령이 남긴 명언 처럼 ‘내가 이러려고 천주교 세례를 받았나?’라며 세례 받은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다.
다시 말한다. 이런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지금의 교회 현실이 몇 해만 이어진다면, 교회는 그이들만의 ‘게토’가 되어 추종하는 이들끼리 한 패를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변질될 것이다. 세상은 그이들의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비난할 것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습과 관습과 온갖 악습에 손가락질 할 것이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도 모르고 오히려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우리 교단의 문제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며 신경 꺼 달라고 요구한다면, 이미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잊은 그이들에게서 ‘희망’을 말하기에는 입만 아프다.
이렇게 세상은 교회 본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어떤(?) ‘게토’를 향해 ‘개독교’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제사장들을 ‘먹사’라는 이름으로 조롱하고 있다. 그이들에게도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변선환, 문동환’ 이름만 들어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던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건만, 그 영화도 한 순간 사라지게 만드는 뿌리 얕은 공동체를 보면서, 그래서인지 그이들도 어느 순간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급기야는 교회 건물을 거대하게 짓고, 연구소, 출판사, 대학, 신문사, 병원 등 등 세상의 기업처럼 각종 이윤 추구에 손을 대면서 본연의 예언자직과 말씀 선포직에 소홀하게 되었다. 셀 수도 없이 늘어난 신학교에서는 깜냥도 안 되는 먹사들을 대량 양산하게 되었고, 그이들이 세상에 보여주는 악행은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요, 하느님에게 다가가려는 사람들의 ‘희망’ 마저도 앗아가고 있다. 결국 이 모든 ‘희망 사라짐’은 곧 그 게토의 현실을 지금 이 땅에서 그대로 보여 지고 있다.
세상의 민심은 이렇게 작아 보여도 무섭다. 작은 조롱이 공공연하게 만연되어 그이들만 외면한채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서 ‘조롱거리’가 되고, 그렇게 ‘희망’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고 권위도 내세울 수도 없게 된다. 태생부터 권위라는 것이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 아닌, 밖에서 부여 되는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닐진대 교회의 공적 기능을 무시한 대가다. 결국 권위도 상실하게 되니 하느님의 예언자 역할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누가 권위 없는 권위를 인정해 줄 것이며, 누가 그 가짜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인가.
일부 개신교 대형 목사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세상의 가치들을 섬기면서 ‘부, 명예, 권력’ 등 등, 뭐든지 있는 족 족 먹어 치운다며 ‘먹사’라고 조롱을 받으면서 시작된 현상이다. 비슷한 예로, 세상의 어느 직업군 보다도 존경과 응원을 받던 기자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지 않고, 공공의 여론과 약자들을 의견을 대변하지 않을 때 우리 사회는 그이들을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자들 스스로 반성하고 깨닫지 못한 몇 년, 십년도 못 가는 권력 눈치만 보는 사이에 책임과 의무를 외면한 그이들에게 세상의 민심은 ‘기레기’라는 회복할 수 없는 호칭을 부여 했다. 만약 천주교가, 사제들이 이 사회에서 공적인 역할을 올바로 행하지 않을 때는 무엇이라 불려질까?
교회가 이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이기를 기도한다. 교회 구성원이 이 사회에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젊은 청년들이 그 교회와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보고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곳에는 가짜 권위를 내세우는 어른들만 가득하고, 해당 공동체의 유지 경영 운운하며 부, 명예, 권력 등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부끄러움이 없다. 이런 그이들을 향해 세상은 당연하듯이 조롱의 호칭으로 응수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 공동체의 ‘망조의 시작’이다.
결론을 지어 본다면, 청년들이 교회에서 점 점 사라지는 이유 중 ‘재미없음’, ‘청년의 역할 없음’, ‘고단한 취업활동’ 등 여러가지를 들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를 꼽는다면 나는 ‘희망이 사라지고 있음’에 둔다. 청년들도 제일 심각하게 생각하는 원인으로 그것을 꼽고 있다. 청년들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거나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그이들도 교회와 교회 구성원이 약하고 실수 많은 이들의 공동체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아직도 교회 안에서 작은 모임들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교회 공동체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많은 교회 어른들에게 희망을 두는, 또 하느님 성령의 바람이 다시 무엇인가를 하실 것이라는 우리 작은 소망을 담아, 우리 공동체에 아직 ‘희망의 감각이 남아 있을 때’ 큰 걸음을 내딛기를 소망해 본다.
오늘 문득 청년들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질문하다가 괜히 불똥이 여기까지 튀었다. 아주 많이 내가 섬기는 하느님, 내가 속한 공동체에 자부심을 느끼다가 최근 여러가지 속상한 일들과 마주하였다. 동시에 우리 공동체도 더 늦기 전에 하느님 그분에게서 받은 본연의 임무에 더 힘을 쏟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으로, 청년들이 교회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희망’이 사라지는 것과 닮은꼴 처럼 보여 이렇게 말을 길게 이었다. 교회와 교회 공동체 모두가 부디 이 사태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청해 본다.
주님! 당신 교회에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을 기억하소서.
'세상에게 말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죠?" (1) | 2018.03.23 |
---|---|
'영성신학 박사 학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3) | 2018.03.15 |
다시 사월이다 (1) | 2018.03.11 |
"나의 어머니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0) | 2018.03.10 |
"천주교 신부 성추행, 성폭행 시도" 사건을 마주하며-2 (2) | 2018.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