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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영화 '침묵'의 로드리게스는 배교자인가? 본문

세상에게 말걸기

영화 '침묵'의 로드리게스는 배교자인가?

해피제제 2017. 5. 4. 15:32

침묵: 엔도 슈샤크




여러분 혹시 엔도 슈샤크의 ‘침묵’을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천주교 신자들이라면 반드시 읽어 보았으면 하는 저만의 필독서가 몇 권 있는데,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 드리고자 하는 엔도슈샤크의 ‘침묵’이 그것 입니다. 아직 이 책들을 읽어 보시지 않았다면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이전에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연배쯤 되어서 다시 읽어 보신다면, 여러분들이 믿고 신앙하는 종교와 하느님에 대해 또 새로운 영감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엔도 슈샤크의 ‘침묵’이 곧 영화로 개봉 됩니다. 얼마 전 영화 배급사에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초대해서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공짜로 영화를 보여 준다고 해서 저도 얼른 신청을 해서 다녀왔더랬습니다.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라는 사람으로 ‘택시 드라이버’, ‘갱 오브 뉴욕’과 같은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유명 감독입니다. 이 분이 ‘침묵’이라는 책을 30년 전에 처음 읽고서,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고야 말겠다며 벼르다가 드디어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침묵’이라는 책에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몇 가지 신앙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데, 그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이 책과 영화는 17세기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와 박해에 대한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 온 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관련 서적을 들고 오면서부터 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언제 천주교가 들어왔을까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 의해서1549년입니다. 우리나라 보다도 235년 빨리 들어왔지요.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 천주교 신부가 발을 들인 것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12월입니다. 일본인 병사들 중에 신자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주기 위한 스페인 예수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님이 한국 땅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일본 전국에 천주교 금지령을 내립니다. 그래도 큐슈에 살고 있는 소서행장을 비롯한 영주들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지에서는 사제들의 사목 활동과 천주교도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새롭게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4년 ‘천주교 금지령’에 더해서 모든 신부와 수사들을 일본에서 내쫓는 ‘추방령’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1619년 ‘교토순교’, 1622년 ‘겐나순교’ 등을 비롯해, 1637년에는 나가사키 근처의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반란이 있었고, 그 주민들의 일부가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어린아이는 물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민 37,000명을 모두 참수시키면서 그때까지 숨어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천주교 신부, 수사들의 씨를 아에 말려 버립니다.  


이런 중에 일본 선교 전체를 관장하며 모두에게 존경을 받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를 했다는 소식이 스페인에 전해집니다. 그러자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이었던 로드리게스 신부와 가르페 신부는 스승의 배교가 사실일 리가 없다며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동양 선교의 총책임자인 발리냐노 신부에게 청원을 하고, ‘일본에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배교를 믿을 수 없었던 제자들의 일본 밀항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두 신부가 오게 되는1640년의 일본은 천주교 박해의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일본 밀항 시도가 있었지만 신부들은 은 300냥, 신자들은 은 100냥 그리고 신자들의 집회는 은 300냥의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려 있었고, 가난한 일본 주민들에게는 신자들과 신부들을 밀고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눈에 불을 켜고 발본색원을 했더랬습니다.


처음 큐슈 지역에 발을 디딘 로드리게스와 가르페 신부는, 다행히 박해 중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낮에는 산 속 화전민이 살던 움막 지하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마을에 숨어 들어 미사를 거행하고, 고백성사를 주는 등 오랫 동안 신부들을 기다려온 신자들에 둘러 싸여 아주 오래 간만에 사제로서의 사목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제 한 명 없이 오랫동안 신앙을 지켜온 그이들의 단순하고 소박한 신심에 진심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잠시, 산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화전민들의 신고로 신부들은 다른 섬 지방으로 피신하게 되고, 신부들을 고발하기를 거부한 마을 촌장과 신자들이 바닷가에서 밀려 오는 파도 속에서 수장을 당하는 십자가 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밀려 오는 파도에 맞서 큰 소리로 성가를 부르며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어떻게 저런 신앙 고백이 가능할지 ‘평화의 시대’에 사제로서 살아가고 있는 제게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이들도 종교의 박해가 없는 평화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자유로이 하느님을 믿고 살아 갔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배교를 거부하며 용감하게 순교를 당했던 모키치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여러 번 배교를 했던 기치지로 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이는 배교를 거부한 가족들이 화형에 처해지는 것을 곁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그 후 그 화형 장면이 꿈 속에서 계속되어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드리게스에게  자신과 같은 배교자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들먹이며 고해성사를 청합니다. 그 덕일까요? 죄를 고백하게 되면서 그 악몽의 불길이 점 점 잦아들게 됩니다. 그렇지만 또 붙잡혀서 십자가에 침을 뱉으라고 배교를 강요당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느님을 모독하고 배교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괴로와서 고해사제를 찾아 오는 것을 반복하는 참으로 약하디 약한 사람입니다.


기치지로가 언젠가는 이렇게 항변을 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순교자의 용기를 주지 않으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겁쟁이로 태어나시게 해 놓고서는 그이들 처럼 순교를 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너무도 잔인한 처사입니다. 십자가에 침을 뱉고, 예수님 얼굴을 밟을 때마다, 그런 저의 발은 너무나 아픕니다. 그렇게 저를 겁쟁이로 태어나시게 했으면서 용감하게 순교를 하라시면, 배교를 하는 제 마음은 얼마나 괴로우신지 아십니까?”라며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항변 합니다. 그러자 신부는 도저히 해 주고 싶지 않은 사죄경을, 그래도 모든 이를 용서하라는 하느님 사명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사죄경을 읊어 줍니다.


새가슴인 저는 기치지로의 그 항변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아마 제가 박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조금만 고통이 주어진다면 바로 배교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평화의 시대가 돌아 온다면 다시금 교회에 돌아와 용서를 청할 것입니다. 저는 기치지로의 그 마음이 십분 공감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로드리게스 신부도 방법을 모색합니다. 신자들에게, 만약 붙잡혀서 배교를 강요 받는다면, 십자가에 침을 뱉고, 예수님과 성모님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아픈 마음을 알아 주실테니 거짓 배교를 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금 교회로 돌아오면 된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관리들의 눈 앞에서 배교를 하고, 또 다시 하느님을 믿는 거짓 배교자가 늘어가자, 일본 관리들도 점 점 영리해집니다. 아무리 신자들을 고통을 주고, 처형을 해도 좀처럼 천주교 신자들이 줄지 않자, 급기야는 신부들을 배교에 이르게 하는 전략을 짭니다. 순교를 하면 직 천당행으로 알고 있는 신자들과 사제들이 계속 순교 당하기를 선택하자 신자들의 ‘정신적 아버지’인 사제들을 배교하게 만들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순교를 선택하는 사제들이 배교할리가 없지요. 해서 영주들도 머리를 짜내어 마침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즉 하느님의 양떼들인 신자들을 사제가 보는 앞에서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입니다. 사제가 배교를 하지 않으면, 이제까지 미사를 함께 하고, 성사를 주면서 신앙 안에서 친밀함을 나누었던 신자들을 한 명 한 명 불에 태워 죽이고, 목을 잘라 죽이고, 물에 빠져 죽이고, 뜨거운 온천에 지져 죽이는 것입니다. 신자들을 밤 새 도록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두고, 고통에 젖은 신음 소리를 신부들에게 들려 줍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며 신부들에게 배교를 강요합니다.


‘당신들의 “영광스러운 순교”를 위해 저 불쌍한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없는가? 너희가 “사랑”의 실천을 중요시 한다면서 어떻게 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인가? 당신이 배교를 하면 저 사람들이 살 수 있다. 사랑의 실천 운운 하면서 당신이 배교만 하면 살 수 있는 저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당신이 말하는 하느님 사랑의 실천이란 겨우 이 정도인가? 그냥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래서 저 성화를 눈 한 번 찔끔 감고 밟고 지나가면, 이 사람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 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오로지 당신 손에 달린 것이다.’   
참으로 악랄한 수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차라리 사제인 내 목숨만 빼앗아 간다면, 목을 치고 불에 태우고, 바다에 수장 시키면, 그냥 그렇게 순교자로서 죽을 수 있겠습니다.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두고 있기에, 잠깐의 고통이 끝나면 내 영혼은 하느님 곁에 가 있겠고, 용감하게 순교한 나는, 교회와 세상이 ‘성인’으로 공경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눈 딱 감고 순교를 받아 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내 눈 앞에서, 오로지 사제인 내 말을 신뢰해서 세례를 받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면서 아무런 의심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신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니가 배교만 하면 살릴 수 있는데, 여태까지 니들이 말한 사랑이 겨우 그런 것’이라며, 배교를 강요 해 온다면 이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로드리게스 신부가 신자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들으며 절규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깊은 침묵을 깨고 말씀을 건네 오십니다. ‘얘야, 내 얼굴을 밟아라, 너의 아픈 발로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가라.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고, 너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렇게 하였다. 그러니 니가 나를 밟고 지나가기를 내가 원한다. 나를 밟고 지나가 저 사람들을 살려라.’


로드리게스 신부는 예수님 얼굴을 밟고 지나면서 그 자리에 엎드려 대성 통곡을 합니다. 자신이 평생 따르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발로 밟고 지나가는 비참한 심정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토록 그분 음성을 듣기를 청했는데 이렇게 처절한 순간에 말을 걸어 오셔서 그랬는지, 또 아니면 그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비로서 알아들을 수 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나가사키의 영주는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몰락 가문의 여인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고 그녀의 아들을 양자로 삼게 합니다. 그리고 매년 관청에 나와 모든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연례 행사처럼 성화를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아주 철저하게 감시를 하며 다시금 사제로서 사목활동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감시의 삶을 살아가는 중에, 어느날 배교자 기치지로가 로드리게스를 찾아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성사를 청해 옵니다. 남들이 모두 ‘배교자’라고 손가락질 할 때, 그래도 지금껏 기치지로가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그런 기치지로가 주위의 시선을 경계하며 로드리게스에게 성사를 청한 것입니다. 로드리게스는 이제 자신은 사제가 아니라며 성사 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기치지로는 간절한 눈빛으로 ‘당신은 영원한 저의 신부님입니다’라며 성사를 청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교자 바오로, 배교자 기치지로’라며 손가락질 받는 가운데, 두 사람만은 비로서 ‘배교자’의 고통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그 둘은 약하디 약한 사제와 신자가 되어 성사를 주고 받습니다. 그렇게 ‘배교자 로드리게스’는 평생 모욕과 업신여김과 비난과 굴욕을 받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영광스럽게 순교를 하는 것과 배교자로 평생을 치욕 속에서 살아가는 것, 두 가지 삶의 모습을 보면서 배교자 로드리게스의 삶은 왜 ‘순교’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한 평생을 치욕 속에 살아가는 그 모습이 제 눈에는 더 순교자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걸으면서 받으셨던, 침뱉음과 구타와 돌팔매질 그리고 채찍질 등도 수난이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를 향한 ‘배교자’라는 손가락질은, 거룩하게 사제서품을 받고, 평생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을 했던 그의 드높은 자부심을 바닥까지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에서 매달리게 되시면서, 하느님에게서 조차 버려지듯 절망하셨듯이, 로드리게스 신부 역시, 모든 이들에게 버림 받음으로써 예수님 그분의 처지를 누구 보다 깊게 이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박해의 시대가 오면, 나는 어떻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을지, ‘침묵’이라는 책과 곧 개봉하는 영화를 감상하면서 성찰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침묵’으로 말을 걸어 주시는 하느님과, 이런 그분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 역시도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기를 청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