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천주교 신부 성추행, 성폭행 시도" 사건을 마주하며-2 본문
따뜻함이 없는 원칙은 무자비하고, 원칙이 없는 따뜻함은 무질서하다
요한 8,2-11: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4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6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7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8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여느 때 처럼 예수는 성전 마당에서 군중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중에 예수를 눈에 가시 처럼 여기는 바라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마침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 앞에 끌고 온다. 그리고 “우리의 모세법에서는 간음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는데 선생님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며 예수를 시험하기 시작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기존의 예수의 가르침과 현행 유대 관습법인 ‘모세법’이 오늘 이렇게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여기서 만약 예수가 ‘그래 어서 돌로 쳐 죽여라’ 라며 모세법에 손을 들어 주게 된다면 예수 자신의 이제까지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또 ‘쳐 죽이지 말라’ 한다면 모세 시대 때부터 지켜 온 이스라엘의 율법을 단번에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적대자들에게는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가 따로 없다. 드디어 예수에게 한 방 먹일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하는 폼을 보니 자신들의 질문에 가타부타 말이 없다. 오히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땅에 낙서질만 하고 앉아 있다. 적대자들은 말이 없는 예수를 보며 “그럼 그렇지 이런 어려운 문제 앞에서 난다긴다하는 예수 너도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선 심정일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만 끌고 있는 뽄새를 보니 과연 이번에는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하리라” 며 쾌재를 부르고 있는 모양새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예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그에게서 흘러 나온 이 해괴한 한 마디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군중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현장을 떠나갔고, 결국은 예수와 간음한 여자만이 남았다. 기세 좋게 예수에게 한 방 먹일 것을 기대했던 완벽주의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깐깐한 율법학자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그러면서 예수 자신 역시 죄 투성이 그녀에게 더는 죄를 묻지 않겠다 한다. 남아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돌로 쳐도 몇 번을 더 칠 자격(?)이 있는 예수가 그녀에게 ‘괜찮다 괜찮다’ 한다. 그러면서 겨우 한다는 한 마디가,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한다.
그렇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용서를 했는데, 저 난다긴다하는 적대자들도 고개를 떨구며 사라지게 하는 선생님이 “괜찮다 괜찮다” 하는데, “너의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너는 이제 아버지 하느님과 너를 끌고 온 모든 이들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아무도 너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잖니,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아버지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는데...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매일 같이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산다. 여기 간음한 여자와의 차이점이라면 ‘이미’ 만천하에 드러난 죄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죄의 차이랄까. 이까짓 죄 쯤은 괜찮겠지 라는 매우 작아 보이는 죄와 ‘살인죄’와 같은 만인의 지탄을 받는 죄랄까.
그렇다. 조금만 물러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 실수들을 짓고 산다. 확연히 처벌을 받는 공공의 범죄가 아닐지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한 죄, 나 보다 약한 이들을 무시한 죄,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은 죄, 다른 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죄, 인간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가격을 매겨 차별한 죄 등 등 돌을 맞아도 몇 번을 맞을 죄를 매일 처럼 쌓고 산다.
바이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떠밀려 군중 앞에 서 있는 간음한 여인을 바라본다. 머리카락은 여기 저기 쥐어 뜯겨 산발이 되어 있고, 얼마나 하찮게 다루어졌는지 살갗이 드러난 곳곳은 온통 멍투성이다. 그러면서도 찢겨진 옷을 부여 잡고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다. 생기 잃은 두 눈에 마치 죽은 이의 시체처럼 밀면 밀려가고 끌면 끌려 온다. 어디서 잃었는지 신발도 걸치지 못한 상처투성이 맨 발은 가녀린 여인의 발이 아닌 짐승의 그것처럼 땅에 쓸려 흙투성이 인데,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저 여인이, 그래도 비틀대며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아마도 손 끝에 꼭 부여 잡은 아주 작은 존재 하나 때문일까.
간음죄를 범한 저 여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변명도 없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밀면 밀리는 대로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다.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 하루에도 몇 번인지 모를지경이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를 찾아 든 건 저기서 ‘돌로 쳐 죽이라’고 소리치는 저이들이 아닌가, 한밤 중, 달 그림자에 가렸지만 분명히 ‘술이 긴 옷’을 입고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던 저이들의 동료들이 아니었던가. 그이들이 던져 주는 하루 연명할 동전 몇 푼이 후회스럽고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하지만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인데... 여인의 손 끝을 꼭 부여 잡고 눈치를 보며 울지도 못한 채 온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저 아이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예수의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라는 말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자기 자신을 돌아 본다면, 저기 고개를 떨군 채 모든 이의 비난을 온 몸으로 받고 서 있는 여인에게, 그리고 그 손을 꼭 부여 잡은 작은 존재를 생각한다면, 과연 누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녀의 삶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군중들은 이제는 더 이상 야릇한 시선으로만 그녀를 바라보지는 않으리라. 공동체는 그녀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작은 존재를 따뜻한 시선으로 돌보아 주리라. 작은 일거리들을 차례 차례 제공할 것이며 공동체가 그 아이를 함께 길러 주리라.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회개하고 밝은 곳으로 걸어 나온 그녀는, 어느덧 상처가 여물어 잃었던 웃음도 다시 지으며, 그렇게 견뎌온 날들에 감사와 찬미를 입에 올리게 되리라.
반면, 낮이고 밤이고 그녀의 침실을 찾아 들었던 이들은 이제부터 공동체 모든 이에게서 용서를 받은 그녀를 부러워 하리라. 그녀는 밝은 대낮의 거리를 거닐겠지만 그이들은 매일 같이 전전긍긍하며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에 살게 되리라. 그녀를 거리에서 우연이라도 마주치면 먼저 고개를 아래로 흘린채 가던 길도 바꾸어 돌아 가리라.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2-3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혀지겠지’, ‘예전부터 관습이 그랬다’는 변명으로 상처를 지니고 살아낸 이들이 버젓히 눈 앞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기억’, ‘연애감정’ 운운하며 스스로 용서 받을 기회를 차 버린 이들은 군중들의 보이지 않는 돌 팔매질에 매일 같이 가슴을 조이리라.
그럼에도 그이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한 가지는, 그이들이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상처 준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래서 상처 받은 이들이 ‘용서를 청해 줘서 고마워, 이제는 괜찮아, 당신도 마음 고생 많았지?’ 라며 오히려 가해자들을 위로하며 용서를 해 줄 때, 그리고 그런 화해의 순간을 모두 지켜 본 군중들은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어서 그이들이 용기를 낼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해 본다.
다시금 세상의 일로 돌아 와서, 성난 군중들은 사제를 향해 ‘정직’도 과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이들에게 ‘면직’을 요구한다. 신뢰를 두었던 그만큼 실망과 분노가 컸으리라. 사랑을 보냈던 그만큼 배신감도 몇 배가 되었으리라.
세상의 요구대로라면 사제의 ‘면직’은 말 그대로 ‘사제복을 벗는 것’이다. 더 이상 교회법으로 신부가 아닌 것이 된다. 더 나아가면, 사제복을 벗는 순간 일반인이 되어 (물론 사제로 살아온 개인에게는 큰 충격이겠지만) 한 사람의 군중으로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도 큰 짐(?)을 내려 놓을 수 있겠지. 완전해 보이는 교회 공동체로 처음부터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깨끗해 보일 수도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머리를 떨구고 있는 사제들을 ‘면직’ 시킴으로써 썩은 사과들을 속속들이 솎아 내는 것도 좋은 수(?)가 아닐까?
좋은 수이긴 한데, 정말로 이것으로 된 것인가? 깨끗하고 완벽하게 보이는 교회로 충분한가? 교회가 늘 설파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와 같은 이제까지의 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르침은 어찌 되는 것인가? 마치 이 건에서만큼은 예외를 두고, 교회 정화 차원에서, 그냥 몽땅 ‘면직’시킬까? 그렇게 되면 모두가 ‘해피앤딩’으로 끝이 날까?
다행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한 번 신뢰를 잃고 나서는 그것이 회복되기까지는 몇 배, 몇 십배의 반성과 회개가 요구된다. 더 치열한 쇄신과 정화가 뒤따라야 하겠고, 그래서 그 노력들이 군중들에게 ‘이제 충분히 되었다’라고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가해자의 한 번의 눈물 섞인 기자 회견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이제 충분하다’ 라고 온 마음으로 인정해 줄 때, 그때서야 비로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한, 그이들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수 년, 수십 년 혹여 세상 끝날 때까지 용서를 청해야 할 수도 있겠다. 한 번 몸에 새겨진 상처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제복을 벗게 하는 ‘면직’이 아니면 이제 남은 것은 ‘정직’이다. 천주교에서 ‘정직’이란 신분은 ‘사제’이지만 ‘사제’가 할 수 있는 ‘성무’를 정지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에게 진료를 못하게 하고, 교사에게 가르치기를 금지하고, 축구선수에게 축구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냥 ‘의사, 교사, 축구선수’이긴 한데, 그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와 역할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사제의 ‘성무’는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죄를 고백해 오는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등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몇 가지 성스런 일이 있다. 그러니 사제로서 할 수 있는 기본 성무를 정지시키는 것이니, 남은 것이라고는 사제로서 그가 피해자들에게 가했던 행위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유일하다.
공적인 장소에서 성사(聖事)를 비롯해, 강의, 설교도 금지 당하니 평생 주홍글씨를 몸에 새기고 살아가야 한다. 어떤 군중이 성추행과 성폭행을 시도한 사제의 강의와 설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과연 어떤 신자가 그이들에게 상담이라도 받으러 찾아 오겠는가. 그이들이 사제복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평생 두 어깨에 십자가로 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이 상처 입힌 피해자들에게 한 번이 아닌 죽을 때까지 회개와 통회의 삶을 통해서 용서를 청해야 할 것이다.
우리 형제 사제단과 교회 공동체 역시 그 십자가를 나누어 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문제가 불거진 사제들을 몽땅 ‘면직’시켜 마치 처음부터 우리 사제단이, 우리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듯이 ‘가지치기’란 쉬워 보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서는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정의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교회 공동체는 완벽한 이들만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아니다. 눈 같이 새하야서 죄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천사들만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란 말이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그랬고, 스승을 은전 30개에 팔아 넘긴 이스카리옷 유다가 그랬고, 예수를 만나기 전 몸을 팔아 생활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고, 마니교에 심취했거나 본처를 버린 성 아우구스티노가 그랬고, 교회 역사에서 보란 듯이 사생아를 둔 셀 수도 없는 교황들이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헌장 8항의 ‘교회는 완전하지만 교회 구성원은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말은 타당하다. 우리 사제단과 교회 공동체는 함께 주홍글씨를 몸에 새기고 상처투성이 피해자들과 군중들이 용서해 줄 때까지 반성과 통회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혹여, 그 ‘주홍글씨’의 무게가 버거워 스스로 사제직을 떠나겠다면 그때는 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와 따뜻한 응원으로 형제의 앞길을 축복해 주어야 하겠다. 그 가난함을 이해하고 새로이 시작하려는 그의 삶이 조금은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럽고 덜 쓰라리기를 청해 본다.
또 혹여, 십자가를 지고 살겠다는 형제 사제들에 대해서는 이제부터의 삶이 고단스러울 것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다. 앞으로의 사제로서의 삶의 여정에 그만큼 반성과 회개의 시간을 거쳐 수많은 모욕과 업신여김과 멸시와 손가락질에도 겸손히 감내하며 그이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로 자신이 피해자들에게 행한 엄청난 고통과 아픔의 무게를 함께 느끼며 보속해야 하겠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날, 그이들이 ‘이제는 괜찮다. 용서한다’라고 말해 줄 때, 교회 공동체도, 형제 사제단도 함께 용서 받을 수 있겠고, 더불어 신뢰를 저버린 세상의 군중들에게도 종교에서 전하는 ‘용서와 회개’의 올바른 예를 스스로 증명해 보일 수 있겠다. 그가 속한 공동체로 다시금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용서’가 아닐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금방이라도 여인을 잡아 먹을 듯이 위협하던 사람들이 예수의 겨우 말 마디에 허둥지둥 물러간 뒤, 고요한 광장에 위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제서야 안도 가득한 여인의 이 대답이 뒤이어 들려 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아무도...” 이제까지 단 한 마디도 변명도 없던 여인의 이 대답은 왜 또 이리도 눈물 겨운가!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인 여인은 이렇게 부끄러움을 안고 예수께 나아갔다. 그리고 위로 가득한 구원을 받았다. 그녀의 말투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고 기쁨의 물기가 배어있다. 예수께 용서를 받은 그녀는 이제는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렇다. 그녀는 돌고 돌아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 왔고 그래서 다시금 그분과 화해할 수 있었다. 이후로 이 여인은 자신이 크게 용서 받은 만큼 더 감사하며 살게 될 것이다. 지난날 죄 중에 살았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예수의 마지막 말씀처럼 ‘다시는 죄 짓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죄 많았던 여인의 마지막 해피엔딩처럼, 진정한 용서와 구원은 처음 떠나왔던 집으로 다시금 돌아왔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언제든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면 될 일이다. 그분은 오늘도 마을 밖에 서서 집을 떠난 자녀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집으로만 돌아 간다면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다. 그러니 오늘 용기를 내어 볼 일이다. 아버지의 집은 누구에게든 항상 문이 열려 있다.
모든 것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세상의 진통 속에 우리 교회 공동체 역시 진정한 사순을 체험하며, 그렇게 상처를 준 이와 상처 투성이인 우리들 역시도 다시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청해 본다.
주님! 저희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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