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유 본문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유
성전세 징수원: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베드로: “내십니다.”
예수님: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베드로: “남들에게서입니다.”
예수님: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다.”
4세기 초대 교회에서는 펠라기우스 360-430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논쟁으로 인해
결국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판명되어 교회의 정죄를 받았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창조로 그 자체로 완전하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해 낙원에서 추방 되었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없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 라는 주장이다.
결국 격렬한 논쟁의 결과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을 들어 주었고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6세기 ‘예수회’가 처음 출현했을 때
도미니코회를 비롯한 기존의 수도회들과 갈등을 빚은 요인 중 한 가지는
바로 위의 ‘펠라기우스 논쟁’이 예수회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Ad Mayorem Dei Gloria’ 라는 모토 아래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세상 끝에까지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모든 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예수회원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 대신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 구원을 이룩하려는 듯한 오해를 받곤 했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하는 예수회원들의 모습들에서
기존의 수도회들은 ‘펠라기우스 이단’의 기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펠라기우스 이단 논쟁’과 ‘예수회의 펠라기우스 오해 받음’이 교차 되면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들려 준 명확한 비유가 더 확연히 이해 되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않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당신 자녀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신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그 대가로 아버지에게 세금이나 공물이나 관세를 낼 필요가 없다.
아버지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을 면제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은 아버지 은총의 선물이지
우리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엄마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우리를 있게 해 준 그 모든 것들에 반갑고, 고맙고, 기쁘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그 분들이 사랑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엄마아빠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드리고 싶은 것이리라.
그리고 이것은 마치 하느님 아버지의 그 모든 것들이 그냥 고마워서
우리가 그 분을 ‘아버지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의 말씀을 열심히 세상에 전하고,
믿지 않는 이들이 그 분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며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 처럼 말이다.
그럴 수 있기를 나의 하느님 그 분의 도움을 청해 본다.
'매일의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괜찮은 내 모습, '하느님을 닮고 싶은' 선한 마음 (0) | 2019.09.05 |
---|---|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 (0) | 2019.08.29 |
예수님이 빵을 먹인 이들은 누구일까? (0) | 2019.08.06 |
하느님이 그대를 부르신다면... (0) | 2019.08.06 |
순례를 동반해 준 두 번째 고마운 벗, 운동화 (0) | 2019.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