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본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글쓴이, 엄기호
“그 정도면 너희 괜찮아”
“세상이 너희를 한심하다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 포획의 중심에는 ‘성장’에 대한 신화 혹은 강요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은 성장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교육을 받고 사람을 만나고 자기 일을 하는 이유는 성장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왜 성장해야 하는가?”
좌(정치적인 이유)나 우(경제적인 이유)나 모두 묻지 않는 것이 있다. 20대가 성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때 이들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성장’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는다. 또한 그 성장이 어떠한 조건에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묻지 않는다. 성장은 다만 모든 도덕적 판단의 전제조건일 뿐이다.
우리는 20들이 유아 상태에 머문 채로 성장하지 않았다고 미리 가정한다.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가 없으며 언어가 없으므로 세상을 읽지도, 세상에 개입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위에서 이야기한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한다”는 말이나 “완전히 탈정치화되었다”는 진단처럼 말이다.
“누가 힘든일을 하지 않고서도 대학을 다닐 수 있는가이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라고 말하는 순간 정치는 끝난다. 다만 도덕적 비난이 시작될 수 있을 뿐이다.
1. 이들은 자신이 말하는 성장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만 가능한지 성찰해보아야 한다.
2. 지금의 시대가 과연 그러한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3. 이 시대가 그런 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언어와 페다고지가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즉 우리는 그동안 성장이라고 생각하던 모든 전제가 다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은 삶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많아질수록 세상을 새롭게 살아갈 용기가 더 많아지는 존재라고 믿는다.
그렇게 많은 것을 다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좋고, 꿈이 없어도 좋고, 못하는 것이 많아도 좋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본질은 언제나 꽤 괜찮은 것이라고...
1부 어쨌거나 고군분투
잉여란 무엇인가? 남아도는 인생이란 뜻이다.
왜 자본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대학생들에게 요구할까? 현재 체제가 잉여를 해소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잉여를 생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시장은 학생들의 스펙에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를 계발하는 능력을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솔직히 말해 스펙은 이 잉여인간의 시대에 ‘자기관리’라는 도깨비 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바로 스펙의 실체이다.
우리 사회에는 대학을 아예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또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학의 바깥’은 없는 것이다. 왜 대학에 가야 하는가에 대해 대학생 그 누구도 이래서 대학을 들어와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후배나 동생에게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없다. 대학도 대안이 아니지만 대학의 밖에도 대안은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가치의 척도는 상품화이다. 우리 사회에서 팔릴 만한상품이 되기 위해 수많은 아이템으로 무장해야 한다.
386들은 이런 대학생들을 속물이라고, ‘찌질이’라고 격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잉여로 내쳐진 자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나 스스로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상품으로 치장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본래 속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속물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2부 뒷문으로 성장하다.
‘대안의 부재’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다 똑같아서 어느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것”과 아예 “투표를 하지 않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성세대가 말했어야 하는 것은 ‘그러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실천의 언어였어야 한다.
냉소에 맞서는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 오락이다.
문화란 일종의 분류 체계이며 분류표이다. 같은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공간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그에 대한 대접은 완전히 달라진다.
여성학자 이박혜경은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주부’라는 사람은 없고 단지 육아와 교육, 금융에 전문가급의 매니저가 된 중산층의 ‘주부’와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일하는 ‘주부’, 그 둘만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한국 가족의 삶은 서로 겉돌고 헛돈다.
특별한 사이일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고 말한다.(왜? 일까) 오히려 외부 사람, 이웃에게 친절하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감정노동의 공동체
가족이건 친척이건 친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가족은 하숙집이 아니라 가족으로 만드는 것, 그것을 감정노동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감정노동을 모성이나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기를 쓰고 노동이 아닌 인간의 다른 활동인 것처럼 포장해왔다. … 가족이 되게 하는 실체는 바로 이 감정노동이다. 단지 가사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노동이란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의 화와 억지를 참아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혼자 있을 땐 상대방을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래서 감정노동은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 중에서 가장 에너지 소비가 많은 피곤한 노동이다.
가족과 함께 술을 먹는 것도, 엄마에게 과일을 잘라주는 것도, 명절에 친척들을 방문하는 것도, 술 취한 아버지의 뽀뽀를 참아내는 것도 이런 감정노동이다. 가족은 감정노동 공동체이다.
한국의 가족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이 편안하게 쉬는 곳이지 노동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감정노동’을 대신하는 것이 ‘소통’이다. 물론 소통도 감정노동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 ‘소통’이 내가 애써서 해야 하는 노동이라고는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이 있어야 정상적이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말을 규범적으로만 하였지 그 ‘소통’이 수고로운 노동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소통이 ‘노동’이 되는 순간 모두가 피곤해한다. 동시에 소통이 제대로 혹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는 자기 가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또한 그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빠진 가족에서는 친밀성을 만들고 유지하는 노동 또한 사라진다.
감정노동이 민주화되지 않는 이상 가족 간의 문제는 사라질 수가 없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도, 기획 가능하지도 않은 불투명한 것이 되어 버렸다. 우연히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소통의 폭력을 넘어...소통은 감정노동이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가진 가족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 말없는 모자는 무수히 많은 노동을 서로를 위해 묵묵히 수행한다. … 소통 이전에 이미 서로에 대한 이심전심 수준의 이해와 배려가 넘쳐나는 영화가 <천수원의 낮과 밤>이다.
우리의 가족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 대다수의 가족은 그런 중산층의 핵가족 모델에 한참이나 못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상적인 가족, 제대로 된 가족이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
가족끼리든 가족 밖에서든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 우리는 늘 치고 박고 싸우면서 끊임없이 침묵의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문제를 감내하고 해결하기 위한 감정노동을 감수할 때만이 가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진실이다.
이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사랑을 통해 우리는 타자에 의해 나의 자아가 붕괴되는 경험을 겪는다. 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사랑하는 그만이 중요하다. 모르는 존재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경험이다. 그래서 사랑을 등가교환 따위는 세상에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기에 상처는 인간의 성장에서 필수적이다. 상처는 인간에게 삶을 감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스스로 기획하는 서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을 통제해야만 한다.
삶은 어차피 불확실하며 우연에 맡겨져 있다.
불안하지 않은 사랑이 있는가
이 시대의 사랑이란 너무 값비싸고 소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 비싸다/ 사랑 인프라가 필요하다.
삶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랑이 임시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팔리기 위해 나를 전시한다.
전시, 필사적인 인정투쟁
인정투쟁이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는 것이 절대적이다.
다이어트, 몸이 최고의 아이템이다. … 몸은 노동윤리의 대상에서 자기관리라는 샐운 윤리의 지표가 되었다.
자기관리와 자기감시 사이에서
돈은 자유다. 돈은 속임수다. … 소비는 ‘무지’를 먹고 살며, 돈은 무지를 통해 작동한다. 알면 먹을 수 없고, 입을 수도 즐길 수도 없게 된다. 달면 돈도 다치고, 소비자도 다친다.
삶을 옥죄는 학생 빈곤, 돈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이다.
돈이 자유라는 말의 의미,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고 존재의 박탈이다. 이들은 돈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돈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다.
잉여, 열정과 삽질 사이에서
“엄마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그걸 열심히 하고 살지.”
삽질, 잉여들의 열정: 잉여인간이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인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인간이다.
왜 열정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열정을 바치면 그만큼 값진 것이 돌아오리라고, 혹은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고대 철학자 키케로는 우정이 다른 어떤 목적을 지향할 때 그것은 더 이상 고매한 우정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우정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최상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열정도 마찬가지이다. 열정은 키케로가 말한 우정을 쌓는 것이다. 열정의 대상은 도구가 아니라 우정의 동반자인 것이다. 그래서 ‘삽질’이라고 불리는 잉여들의 ‘열정’은 그 자체가 목적인 유희이다.
사실 노동윤리가 아닌 소비 미학을 중시하는 이들의 삶에서 원동력이 되는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이다. 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재미이다. 재미가 있어야 참여를 하고 재미가 있어야 동료로 맞이한다. 따라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치에 대한 참여도 시민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게이머로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은 이들이 재미만을 얄팍하게 추구하기 때문에 깊이와 진정성이 없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재미에는 전혀 다른 윤리적 차원이 있다.
이들은 ‘오락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참여’하고 단독자의 고독한 작업이 아니라 ‘공동 작업’을 수행한다.
그것은 놀이를 노동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놀이처럼 하는 것이다.
이들의 재미는 남을 희생하는 재미가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는 재미이며,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낀다.
교환을 위해, 축적을 위해 열정을 다해야 하는 순간 열정은 고문이 된다.
피아노를 그만둔 다음 다시 피아노에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 피아노가 다른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닌 친구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쏟아 부은 열정,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열정이 무력화되다/ 반면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빵’했던 친구들은 자신의 열정이 삽질로 돌변하는 경험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과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너무 알면 다친다’ 차라리 모를 때는 순수하게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지만 내부 사정을 잘 알게 되면 도저히 그 일을 이전처럼 열정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
이 보기 드문 삼위일체, 자신이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맞아떨어지는 행운을 만들고 누렸지만....
열정츨 착취하는 자본주의/ 나도 버텼는데, 너도 버텨야지. 이 정도 상황도 못 버티면 열정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 열정을 가진 아름다운 내 모습, 그런데 열정이라는 것을 꼭 아름답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인간들이 꼭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누리고 산 삶이 있었으면 한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 없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가, 나는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삶 자체가 나에게는 항상 감당 못 할 고민을 안겨준다.
우리 시대는 돈을 조금 벌더라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노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다.
소비만 미학화된 것이 아니라 노동 역시 미학화된 것이다. … 일과 놀이와 자아실현이 동시에 될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한다.
하지만 착취를 당하는 이들에게는 착취하는 자들이 눈도 돌리지 않은 것, 즉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이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고 향유했던 감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 ‘순수한 유희’에서 만난다.
다시 교실에서/ 그러나 말을 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 권리가 권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이 필요하다. … ‘듣는 의무’를 요청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려야 한다는 것은 이들의 거칠고 정리되지 않고 울퉁불퉁한 목소리를 우리가 진지하고 꼼꼼하게 듣는 훈련이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 우리는 길고, 반복되고, 우물거리고, 때로는 모순되거나 비약인 이야기를 참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말할 권리’는 있지만 ‘들릴 권리’는 없는 셈이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이들에게서 동등한 사유의 힘을 강조하는 이유는 서문에서 말한 ‘성장의 신화’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들이 생각 없이 살아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각, 즉 성찰은 성장의 지표이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말은 곧 이들이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옮겨간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 생각이다. 자기 생각이 있어야 줏대 있게 움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면 자기 삶과 공동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였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나 난ㄴ 이 글의 전체를 통해 이들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르게 경험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세상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가는 나의 지적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신영복씨는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 …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가르치셨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세상에 대해 동일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눈높이가 같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을 공유한 공동체가 아니라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도모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 출발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란 푸코가 말한 것처럼 질문에 앞서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질문의 결과’, 그것도 ‘불가피하게 임시적인 질문의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란 끊임없이 생산되고 해체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질문을 공유하는 것은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의 공유는 더 많은 다른 답들을 생산한다. 질문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 다른 답들을 환영한다. 그것이 나에게 더 많은 영감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해답의 공유가 같아져야 한다는 폭력이라면 질문의 공유는 차이에 대한 생산이며 다른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환대이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질문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숭산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오직 물을 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낯선 것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각오할 ‘용기’가 필요하다.
적극적 수동성이란 바쁨과 분주함의 차이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선생은 그들이 사유를 확장할 수 있도록 그들의 질문에 대해 ‘개념적’으로 다시 질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 선생의 역할은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이미 있음을 일깨워주고 북돋워주며 개념적 사유가 가진 짜릿함을 만끽하게 하는 것이지 그들의 무지를 질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라는 존재는 내가 가진 이 몸뚱이가 존재하는 곳에서부터 가능한 것이고 이것은 사유와 생각에 앞서는 실존의 단계라 생각한다.
‘나’라는 고유함은...몸에 남은 이 상처, ‘몸뚱이’ 자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수업이란 이들이 가진 사유의 힘을 집단적인 지성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흐름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과서는 힘이 쎄다/ 학생들은 공교육에서 배운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진리’라고 믿거나 아니면 그것을 ‘진리’로 이야기 한다.
그 ‘진리’ 말고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은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아이들의 삶을 겉돈다. 그러나 그 겉도는 지식이 아이들의 세계관을 거의 절대적으로 지배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도덕에 맞서다/ 몸과 진리가 만나는 곳, 그것이 바로 도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교실에서 우리가 하는 수업은 선포된 ‘진리’에 맞서는 일이라고 학생들에게 종종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도덕적 이야기야말로 가장 잔혹한 이야기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분류되고 서열화 되는 순간 ‘인간’이라는 범주는 깨진다.
인지상정, 즉 인간의 공감 능력은 우리 사회의 서열 체제 앞에서 멈춘다.
도덕이 반윤리를 승인하며 바로 이것이 현실 정치의 역할이다. 인간을 서열화하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로 갈라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지 않은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된 자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서 우리는 그렇게 분류된 인간들을 만나고 무의식중에 그 분류에 따라 행동한다.
다시 교실에서/ 나는 교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하여 그 언어가 도달하는 곳까지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깨달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무슨 삶에 대한 화두를 찾을 수 있는가? 삶에 대한 화두가 없는데 무슨 성장이 가능한가?
죽은 대학이 이런 조그마한 구멍들조차 용납하지 않는 리바이어던과 같은 괴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확한 현실이다.
불가능한 곳에서 가능함을 상연하는 것, 그것보다 멋진 혁명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가 너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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