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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 본문

책에게 말걸기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

해피제제 2011. 2. 11. 09:01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

글쓴이, 헨리 나웬 신부

삶에서 많은 사건이 너무도 쉽게 우리를 사방으로 끌어당겨 우리의 영혼을 잃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한결같이 하느님의 품에 닻을 내리고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릴 때, 우리는 죽음까지 포함하여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 기쁨을 주는 모든 것과 고통스러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회를 준다.

사목자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돌보면서 그 상처를 통하여 타인을 치유하는 사람이다.

사목자의 상처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수용하는 환대의 자리이며 타인을 위한 치유의 원천이다. 상처가 희망의 표지이고 사목자의 고독은 피하고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한 선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순명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항할 수 있는 의지는 강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

하느님의 집에서 보고 듣게 될 것을 이 세상의 관계(공동체, 가족, 친구) 안에서 미리 맛보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했다.

9월 1995년

라르슈(방주)

떠나는 것이 이로울 때가 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직 당신 뜻이 제 안에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되돌려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마음과 사랑을 다해 제 영혼을 바칩니다. 하느님은 제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아멘

기도는 무의식과 의식을 이어주는 다리다. 기도는 정신과 마음, 의지와 격정, 머리와 가슴을 연결시킨다. 기도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이 내 존재 구석구석에 파고드시도록 이끄는 통로다. 기도는 완전함과 조화, 내적 평화를 위해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길이다.

그렇다면 내 기도 생활은 어떠한가?

과연 나는 기도하기를 좋아하는가?

나는 기도하고 싶어 하는가?

나는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가?

모든 사람이 기도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지금쯤에는 기도에 푹 빠져 성령의 불길로 활활 타올라야 한다. … 나는 기도할 때 어떤 느낌을 받기는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 체험이 깊지 않다. … 나는 내가 더 늙어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도가 쉬워지리라고 기대하며 살아왔다. … 어둠과 메마름이 오늘의 내 기도 상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인 듯싶다.

어쩌면 나의 기도, 하느님 곁에 있으려는 나의 노력,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나의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내맡길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 나는 그동안 지원받은 만큼 배척당하고, 환영받은 만큼 내침당하며 사랑받은 만큼 미움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우정이 진정한 수양임을 깨닫게 되었다. … 우정은 신뢰와 인내, 주의력과 용기, 참회와 용서와 경축을 요구하며 무엇보다 충실함을 필요로 한다. … 시기와 적개심, 분노와 절망 같은 감정이 얼마나 쉽게 나를 덮치곤 했던가를 깨닫고 나니 기가막힌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여전히 친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하지만 이 점이 우리 세 사람 모두에게 힘든 고역임은 분명하다.

무엇을 ‘느끼든’ 중요한 것은 성실하게 머물러 내적 선택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하려는 나의 노력은 우정을 위한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와 우정은 정화를 필요로 하며 덧없는 감정에 덜 의존하고 한결같이 헌신하는 일에 더욱 깊이 뿌리 내려야 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대단히 슬기로운 말로 들린다. 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듯이 내 몸과 영혼이 이 지혜를 따라잡으려면 참으로 많이 수양해야 한다.

# 우리는 이제 서로를 지원하며 격려할 수 있게 되었네

나는 조지프가 뒷문을 통하지 않고 앞문으로 병원에 들어가 환자들을 문병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에이즈를 안고 살아가는 스티븐이 그에게 용기를 북돋고 있다는 사실도 무척 고맙다. 그가 흔연한 마음으로 슬픔의 잔을 마시고 지금 이 순간이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도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어쩌면 나는 도학적(道學的) 성향 때문에 정신을 고양하는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밖에 없는, 흔히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일상생활보다 선포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것만 같은 정신을 고양하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일 수 있다.

내가 안식년을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사제로서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는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첫 번째 의문은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행복한 결말로 재빨리 끌어가는 기질이 없다면 이야기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즐길 것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장차 하느님의 집에서 보고 듣게 될 것을 미리 맛보는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은 온갖 기쁨을 헛되고 덧없는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쉽다.

세상에 존재하면서 세상에 매이지 않는 것, 하느님 나라를 섬기는 데 세상의 책략을 이용하는 것, 받는 것보다 베풀 것이 더 많다는 확신 속에서 재력가들에게 겁 없이 응수하는 것, 가난한 이들을 위해 탄원하되 부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탄원하는 것,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드는 것은 바오로가 수행한 투사다운 종의 직분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함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의 단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수많은 ‘어르신’에게 우리를 형제자매로 대해 주도록 줄기차게 요구하는 회개한 종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이 있어 살아가는 동안뿐아니라 추억에서도 나를 지켜주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에 안심할 수 있다.

Empty bell: 초교파 비영리재단, 명상과 기도를 실천하며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시도

천사노트: ‘너의 천사에게 줄 무슨 생각이 있느냐?’ 일이 정말로 놀이가 되어간다.

당신이 경험하는 일과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과연 당신이 이처럼 환상적인 체험을 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하느님이 어루만져 주실 만큼,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할 만큼 특별한 사람인가?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다. 당신이 이런 일을 누리고 경험할 만큼 한 일은 없다.

내 우주 체험을 들려준 사람들 가운데 어렵게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뿐이다. … 당신이 실제로 가서 이를 직접 체험하지 않는 한, 참으로 알 수는 없으리라. 이것이 바로 신비가의 고독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반드시 전달해야 하는 무엇인가를 목격하고 체험한다는 것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르 4,22) 이 말씀은 ‘숨겨지고 감추어진 삶’을 제대로 살도록 나를 독려한다. 내가 고독에 충실할수록 … 고독의 시간을 순결한 마음으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더없이 내밀한 내 생각과 느낌은 어디선가 어떤 방식으로든 빛을 보게 되리라. 내 생각과 느낌이 빛 속에 드러났을 때 이를 보는 이들이 기뻐하기를 기도한다.

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내어 줄 것은 참으로 많다. 하지만 대화 대신 만남이라는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기도가 돌처럼 무감각해졌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보낼 한 해는 기도의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 기도는 내 안에서 나를 이끄시는 성령의 기도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나의 기도, 하느님 곁에 있으려는 나의 노력,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나의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내맡길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10월 1995

공중그네에서의 ‘내맡김’의 아름다움을 체험

공동체는 함께 살고 일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공동체는 육체의 제약을 조금도 받지 않는 마음의 끈이다. 공동체는 실제로 세상 곳곳에서 타오르며 우정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침묵의 기도를 함께 바치는 촛불이다.

나는 이 칠십대 지도자가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은 물론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한테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지녔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의 안목이 철저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면서도 종파적 편협성이 없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교황의 말은 어느 특정한 철학과 신학에서 영향을 받고 있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스무 세기에 걸친 그리스도교 신앙 전승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한때 영원해 보이던 많은 것들이 덧없는 것으로 드러났는가 하면 대단히 덧없어 보이던 많은 것이 영원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는 여러 사상과 진술 가운데 그 모두를 떠받쳐 주는 어떤 안목이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

“자네는 지금 살아가는 삶과 학업, 기도와 친구 관계를 사랑해야 하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이 자네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실 때가 오리라는 걸 믿게 될 걸세. 지금부터 몇 년 후에 가서 알아도 될 일을 미리 알려고 덤비지 말게나.”

스티브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길로 들어서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는 아름다운 영감으로 계시된 모험이며 감행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스티브가 안정된 삶을 보장해 주지만 근본적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직장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했다는 사실에 감사드린다.

나는 질서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 성적 활력을 억눌러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야성적 존재 에너지와 접촉하기 위해 질서와 규율을 포기해야 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찾아내려는 집중적 노력이 필요하다. … 카르멘 같은 이가 내 삶에 뛰어들어 내 발목을 잡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조나스는 삶의 가치가 생명 그 자체 있음을, 몇 시간에 지나지 않았던 레베카의 생애가 수많은 시간을 살았던 베토벤이나 샤갈 또는 간디의 삶만큼이나, 심지어는 예수님의 삶만큼이나 가치가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내 초에 자주 불을 밝힌다. 글을 쓸 때는 글쓰기를 기도로 승화시키려고 초에 불을 켜고, 기도할 때는 나와 집에 있는 벗들을 연결시키려고 촛불을 밝힌다. 공동체는 함께 살고 일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공동체는 육체의 제약을 조금도 받지 않는 마음의 끈이다. 공동체는 실제로 세상 곳곳에서 타오르며 우정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침묵의 기도를 함께 바치는 촛불이다.

11월 1995년

오늘날 예수님은 하느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 오셨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알든 알지 못하든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삶에서 많은 사건이 너무도 쉽게 우리를 사방으로 끌어당겨 영혼을 잃게 한다. 한결같이 하느님 품에 닻을 내리고 그 사랑에 뿌리내릴 때, 우리는 죽음까지 포함하여 그 무엇도 두려워 할 것이 없으며, 기쁨을 주거나 고통스러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예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회를 부여할 것이다.

우리는 무서운 세상에서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들로 통한다.

자신의 병을 영적 여정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갈 수 있는 큰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나는 교회를 사랑한다. 내가 교회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은 문젯거리, 갈등의 진원지, 논쟁의 텃밭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다.

우리가 한 해 내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듯 그리스도의 수난도 가까이해야 하는 까닭은 부활과 수난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도록 부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으면서 크고, 우주 속의 작은 입자이면서 하느님의 자랑거리며, 하찮고 겁이 많으면서도 우주의 주인 되시는 분의 자녀들이다.

우리 생명은 불멸성을 얻으려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씨앗

영원한 삶이 존재하듯 영원한 죽음, 곧 두 번째 죽음도 존재한다. 지옥은 영원한 죽음이다. … 예수님과 사도들은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영원한 삶이 가능하듯이 영원한 죽음도 가능하다. (묵시 21,8)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부여하신다. 사랑에 ‘예’ 또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신다. 나에게 선택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나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중한다는 뜻이다. 나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아니다. 자유로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나 또한 자유로이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이는 ‘아니요’가 가능함을 뜻한다. 영원한 삶은 미리 결정된 기정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의 결실이다.

12월 1995년

나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하루하루를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정말 간단한 진리다! 그럼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 사람들에게 평화를 건넸는가? 누군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도록 만들었는가? 치유가 되는 말을 했는가? 분노와 적개심을 떨쳐버렸는가? 용서했는가? 사랑했는가? 바로 이런 것들이 진정한 물음이다. 나는 지금 내가 뿌린 작은 사랑이 이곳 현세와 다가올 내세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으리라 믿어야 한다.

“내가 배운 것은 상당히 많다. … 이웃의 부러움은 지상에서 가장 고독한 기쁨이며, 자아도취는 반드시 불행을 낳고, 가장 고약한 동기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은 이들의 섬 Island of the Dead> 이 그림은 어둠과 빛, 죽음과 삶, ‘매력 없는 매력’을 이야기한다.

“매력 없는 매력의 세상에서 여러분은 서로의 사랑을 어떻게 살아낼 작정인가?” …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그 사랑을 내세우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계속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서로의 단점을 용서하고, 서로가 지닌 은총의 선물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은 다른 이들, 곧 여러분의 자녀와 손님과 가난한 이들을 지향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에서 자양분을 얻어야 하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관심을 주십시오.”

렘브란트의 판화 <나무 세 그루> “여러분은 두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깨닫든 모르든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하며 죽음의 골짜기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시는 제삼자가 계십니다.”

보좌신부는 권능에서 무능으로, 강함에서 약함으로,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위대함에서 작음으로, 자립에서 종속으로 옮겨가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소망을 아름답게 고찰했다.

강생의 신비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느님은 힘없고 약점투성이인 우리, 보잘것없고 종속되어 있는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 노인, 힘없는 사람이 있는 곳에 계신다. 그러니 우리의 초점이 성공과 영향력과 권력이 있는 곳에 맞추어져 있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충실함은 부서진 마음과 외로움과 인간적 요구가 있는 곳에 얼마나 기꺼이 찾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교회에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미래일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세속적 이해’ 속에서 온전하게 자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마음과 모든 인간 안에 살아 있는, 힘없는 아기 곁에 머무는 것이다. …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진정 기뻐할 수 있다.

나는 어쩌면 대성당이 깊은 신앙과 신심, 경의와 아량,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것 못지않게 인간의 교만과 거만, 권력욕과 영향력, 입신 출세욕에서 비롯된 산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은 돌 속에서 권력과 신심이 만나는 자리를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 가운데 하나다.

이 사제는 교회 안의 수많은 복잡한 구조 속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내 노력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에게 그렇듯이 그 한테도 문제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나에게 “난 언제나 자주색 제의를 벗고 보통 사람으로 돌아갈 때 행복을 느낍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곧이어 덧붙였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나의 소명에 충실하고, 내가 바라는 만큼 사물이 변하지 않더라도 내 삶이 결실을 맺으리라 믿어야 하겠지요.” 이처럼 성실하고 정직한 교회 인사가 마음에 들었다.

존경과 사랑을 담아....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가까움을 낳고, 부재가 현존을 낳고, 고독이 공동체를 낳는 듯싶다. 몸과 마음과 정신, 내 모든 존재가 조건이나 두려움 없이, 남김없이 사랑을 주고받으려는 열망을 느낀다. 내가 사랑 아닌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원한을 품고 증오나 질투를 느끼며 미심쩍게 행동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늘 주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힘을 불어넣고 감사하며 칭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나는 이렇듯 내 마음속에서 영원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영혼의 눈으로 감지해 내는 진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그 비전에 따라 삶을 꾸려나갈 힘을 얻도록 기도드린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진 분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는 말은 중요합니다. 아무쪼록 당신의 말이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제발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두세 마디 단죄로 요약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십시오.” … 내가 그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가 나로 하여금 내 마음을 파악하도록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

1월 1996년

나는 먼 옛날 예수님 탄생 때뿐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병들고 늙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의존적이 될 때마다 연약함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사랑을 받으리라 믿을 때 비로소 우리의 연약함을 하느님의 발현 장소로 생활화하게 된다는 말도 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연약함은 쓰라림과 무정한 마음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강론도 모두가 같은 지붕 아래 사는 이들과는 무관하게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 같았다. 봉독된 말씀을 두고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반응하여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나눔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급박한 요구에 응답하는 사목에서 기도와 관상, 묵상과 내적 삶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수도자가 동시에 사회 활동가가 될 수 있는가? … 그에 따르면 고독과 침묵과 기도 생활은 자칫 ‘현실 도피’로 비칠 수 있다.

캐나다에 사는 네덜란드인을 ‘지나치게 미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들은 “당신은 정말 헨리 나웬다워요” 하고 말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옳았다. 내겐 목소리를 과장하고 사물을 지나치게 극화하며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비판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만남을 사기를 높이며 영감을 주는 것으로 여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2월 1996년

“하느님을 위해 바쁘게 사느라 자칫 하느님을 잃을 뻔했어. 그러다가 내 첫사랑을 되찾았으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 지금부터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후에 우리 두 사람이 어디에 있게 될지 궁금하다. 나는 언제까지나 우리가 함께 하느님 곁에 있기를 소망하고 기원한다.

마크 엡스타인의 ‘붓다의 심리학 Thoughts without a Thinker: Psychotherapy from a Buddhist Perspective’

‘약함의 영성 spirituality of weakness’

흐르는 눈물은 비탄의 눈물이었지만 또한 감사의 눈물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껏 알아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큰 힘을 가진 친구, 내 사랑하는 벗 아담

라자로의 부활: 죽음은 영광과 승리와 자유로 건너가는 길이다.

오후 세 시에 우리는 커다란 원을 만들고 기도를 바쳤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아담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라고 말했다. 여러 사람이 나서서 아담과 함께한 특별한 순간을 이야기했다. ‘소박한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냈다. 온갖 말과 추억과 영상과 달리 이처럼 소박하고 가난한 아담이 그동안 어떤 방법으로 온유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는지 깨닫게 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우리가 어디에 가서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지닌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달리 어디에 가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치유의 두 가지 특징 1. 치유자를 믿어야 한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2. 치유자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9,28)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9,29) … 치유자의 겸손과 환자의 믿음은 모두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다.

나는 예수님이 숨은 생활을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이야기했다. 기부를 하든 기도나 단식을 하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 가까이 친교를 맺으려는 목적에서 은밀한 방법으로 행해야 한다. 사순절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시간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을 찾지 못한 채 줄곧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과 사물 속에서 기쁨과 평화와 만족을 찾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다.

“당신은 메시아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너는 내가 내 교회를 세울 반석이다.”라고 대답하신다. 여기에는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 곧 진리의 상호성이 존재한다. … ‘반석’의 속성은 우리가 구원과 치유의 필요성을 고백할 때 드러난다. 우리가 하느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깨달을 만큼 겸손해질 때 우리는 공동체의 건설자가 될 수 있다.

교회는 단순히 주교들이나 교황이 자리하는 ‘저기’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식탁을 둘러싸고 있는 ‘바로 여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아픔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역설에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사순절은 부재와 공허, 욕구불만에 대한 체험을 확인함으로써 우리가 많은 일로 붐비는 삶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내밀한 갈망을 충족시키겠다고 약속하신 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새롭게 깨우치는 시간이다.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리라.” …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해서는 안 된다.’에서 ‘할 수 있다’로 바뀌는 놀라운 흐름이다. 우리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 죽어가는 이를 보살피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악한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기쁨을 드려야 한다는 소원한 하느님 대신, 더없이 가난한 사람이 우리 곁에 있듯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신다.(어떠어떠한 행동이 아닌.... 곁에 계신 그분에 대한 사랑과 현존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

내가 늘 경탄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담긴 단순성과 그에 못지않은 급진성이다.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더없이 주요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마음을 바꾸기 위해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내가 경험한(?) 아버지는 이런데 어떻게 또 다른 감정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3월 1996년

나는 어느 누구와도 벗으로 지내고 싶다. 나는 갈등이나 다툼을 좋아하지 않으며 분열과 대립을 싫어한다. 이것은 연약함이자 강력하게 발언하지 못하는 용기 부족이며 배척에 대한 두려움이다.

예수님은 분열을 조장하셨지만, 이러한 분열은 편협이나 광신의 결과가 아닌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급진적 부르심에서 나온 결과라고 믿는다.(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12,51-52)

그리고 내 바람과 반대로 분열이 생길 때, 분열을 막고자 노력할 때와 다름없이 애정으로 이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용기를 찾아내야 하리라. 그럴 때면 예수님의 혹독한 말씀이 위안이 되리라.

우리는 정신적으로 건강해짐으로써 세상에 기여한다는 조지프 캠벨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 캠벨은 관상과 활동을 구분하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내 신념을 확인시켜 주었다. 예수님의 활동은 하느님과의 내적 친교에서 흘러나왔다. 예수님의 현존은 치유력을 지녔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우리는 예수님께 향하는 것도 너무 경제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바치는가? 내 이웃한테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푸는가? 나 자신한테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는가?” 하지만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네 사랑을 전부 다오. 그러면 내가 너에게 네 이웃과 너 자신을 주리라.”

“제가 그 남자나 그 여자, 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기쁩니다. 제가 그 집안이나 그 나라나 그 인종에 속하지 않으니 다행입니다 저는 그 무리나 그 모임이나 그 군중 속에 싸여 있지 않으니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러 기도는 우리가 곧잘 바치는 ‘바리사이의 기도’의 기도와 무엇이 다른가 … 우리는 대체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 이러한 기도는 연민을 경쟁으로, 경쟁을 대립으로, 대립을 폭력으로, 폭력을 전쟁으로, 전쟁을 파괴로 몰아간다. … 우리는 동물이나 식물 또는 암석 같은 피조물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하느님께 감사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피조물보다 낫거나 못한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온갖 피조물처럼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점을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하느님,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 이루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의 관점에 따르면 가장 큰 불행을 포함한 모든 것은 하느님의 활동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

모든 인간한테는 죽음, 의기소침, 배신, 배척, 가난, 이별, 상실과 같은 불행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우리한테는 이런 것들을 통제할 힘이 없다. 하지만 이를 탓할 것인지,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기회로 삼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능 장애가 심한 듯 보이는 예수님의 가정

교회가 특히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이들의 독신 생활을 높이 사는 것도 예수님의 우려스러운 가정 사정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ㅋ ㅋ ㅋ

‘실명한 눈으로 볼 수 없는 활기찬 빛을 나는 그대의 밝은 눈으로 알아보노라. 절룩이는 내 걸음걸이로는 힘없이 떨어뜨리고 말았을 그 짐을 그대의 굳건한 다리가 떠받쳐 주는도다. 바로 내 생각이 그대의 마음에 조형되고 있도다.’ … 이는 내가 인간의 사랑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형성되어 나오는지 나는 안다.

라자로에게 간다는 것은 적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유다로 간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라자로에게 간다는 것은 또한 생명의 장소로 향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자로의 부활은 죽음과 생명이 맞닿는 사건이다.

처음에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 곧 우리의 수호자요 방패가 되셨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시면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곧 우리의 동반자요 벗이 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당신 성령을 보내셨을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 곧 우리의 숨결이요 맥박으로 계시되셨다.

4월 1996

내가 깊이 갈망하는 것은 관상적 차원이 결합된 공동체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클레어가 받은 진정한 축복은 그녀의 명성이나 부 또는 성공이 아니라 곧잘 외로움을 타던 그녀의 작은 마음에 숨어 있었음을 알리고자 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것은 사랑과 고통, 친교와 이별, 친근함과 소원함의 이야기였다.

일치와 친교와 성실은 부활한 삶이 지니는 세 가지 영적 자질이다.

나의 신앙과 불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어쩌면 이 둘이 서로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 내 인생의 생장점인지도 모른다.

부활 이야긴 다가옴과 떠남, 친밀함과 거리감, 붙잡음과 떠나보냄, 고향 생활과 선교 생활, 현존과 부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는 날마다 이 같은 긴장과 마주친다.

‘부활이 실제로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많이 제기되지만, 나는 우리에게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다면 부활은 날마다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크로산과 보그와 존슨은 모두 내게 도움을 주었으며, 무엇보다 예수님 이야기와 우리 이야기를 결합시키도록 나를 자극했다.

(앤드류 하비) 강연은 탁월했고 감명을 주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투명하고 밝고 자유롭고 해학적이며 눈부신 앤드류의 존재 때문이었다. … 청중에게 개인적 물음을 던져 하느님을 철저히 사랑하고 이웃에 봉사하는 인격적 변모를 유도하는 방식 등 그의 모든 면이 나로 하여금 이 ‘말씀을 전하는 일꾼’을 알고 싶게 만들었다.

5월 1996년

야망으로 흘러넘치는 세상 한가운데서 제가 겸손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관심이 권력으로 한껏 쏠리는 세상에서 제가 연약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지극히 복잡한 주위 환경 속에서 더욱 단순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보복과 앙갚음이 이토록 커다란 고통을 유발하는 사회에서 제가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처럼 많은 재물을 탐하고 큰 성공을 갈구하는 풍토 속에서도 가난한 마음을 지키도록 도와주십시오. 인생의 중반에 다다른 이때, 열린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가며 당신이 주신 은총의 선물을 신뢰하고 위험을 감내하며 당신을 섬길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걱정에 싸이는, 이런 순간에는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자유의 날이다. 성령께서 마음 내키시는 대로 불어닥치시는 자유의 날이다. 성령 강림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건, 곧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고 생각하며 고찰해 보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예수님의 영은 우리를 바로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게 하고자 우리 안에 머물기 위해 오신다.

성령의 빛은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사랑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세상은 두려움으로 지배한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영을 모시고 살지 않을 때 종교는 성공과 명성과 인기를 바라는 인간적 욕망에 이용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교회로서 하느님 이름으로 서로를 해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깨달았다.

그들은 그런 고통 때문에 때로는 교회를 떠났지만, 교회를 떠남으로써 예수님의 메시지와 연결되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내가 영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모든 부분이 스스로 귀속되는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나에게 돌아와 너의 온갖 짐, 모든 골칫거리와 두려움과 고민거리를 내게 넘겨라. 나와 함께하면 네가 안식을 얻으리라는 걸 믿어라.” 나는 이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담긴 치유 능력을 믿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인생은 ‘잠시 동안’이요, 짧은 기다림의 순간이다. 하지만 인생은 공허한 기다림이 아니다. 기대를 안고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약속이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안다. 자연은 봄이 되면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나는 이 덧없는 세상을 두고 불평하기보다 일시적인 것 가운데 맞닥뜨리는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부자 청년 이야기’는 오래도록 사랑을 지향하는 작은 발걸음을 시사한다는 깨달음이다.

어떤 것에서의 이탈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애착이 클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결과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서로를 필요로 했던 그들은 그저 함께 있으면서 서로를 보살피고 뒷받침하며 지지한다.

6월 1996년

이 ‘결정적 실수’는 기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오래도록 결실이 풍성한 삶을 살다가 마주친 단 한 번의 불행한 사건, 단 한 번의 실수, 단 한 번의 죄, 단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패배로 기억되는 일은 정말 가능하다. … ‘성인들’이 좀 더 오래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공을 놓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작은 실수로 그들의 높은 덕이 무위로 돌아갔을까? 이런 생각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 하느님, 오직 하느님만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알고 온전히 사랑하고 철저히 용서하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신다.

7월 1996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 또 누구를 대상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가? 일의 성과를 자존심의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대단히 취약해진다.

8월 1996년

가정은 우리에게 소속감을 줄 수 있지만,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귀속되어야 하는 하느님과 맺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이들한테서 떠나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온전히 ‘예’라고 응답하기 위해 당신 가족한테는 ‘아니요’로 대응할 때가 많았다.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이 ‘커 나가도록’ 스스로 ‘작아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지배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사람들이 지지와 격려를 받으며 지도력을 키워 나가도록 만드는 위대한 내적 힘과 확신이 필요하다.

진정한 기적은 예수님이 몇 덩이 빵으로 많은 빵을 만드신 일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빵에 집착하지 않고 빵은 모두에게 충분할 만큼 있음을 믿도록 만든 일이었을지 모른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불어나게 하신다. 우리는 공적으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딘은 나의 양심이다. 딘은 나를 사랑하면서도 비판한다. 나를 걱정하면서도 흔들어 놓는다. 나를 지지하면서도 내 한계 너머까지 도달하라고 촉구한다. … 이 유다인 친구는 나를 깨우치는 예언자가 분명하다.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만일 그가 나더러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삶에서 오는 상실을 이겨내는 것이 나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님 때문인가?’

‘대면’은 사랑 안에서만 결실을 맺는다. … 하지만 상대가 끝내 응답하지 않고 해로운 일을 계속할 때는 공동체의 행복이 우선이다.

‘하느님은 시간을 창조하시되 충분하게 창조’하셨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은 무척 쉽다.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는다면, 하느님께서 늦게 온 사람들한테도 온종일 일한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많은 품삯을 주신다는 점을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안다면, 하느님이 이웃에게 아량을 베푸실 때 우리는 마냥 기뻐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에게 ‘보살핌’을 거론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보살피고 서로를 보살피며 이웃을 보살피라.

나는 제도화된 삶이 위선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 교회나 더 큰 공동체 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나머지 감당하지 못할 일들을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나는 위선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이 공동체임을 터득해 가는 중이다. …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애정을 가지고 비판하고 나 자신의 결함을 용서할 수 있을 때, 나는 위선자로 취급당하지 않는다. 위선은 내가 가르친 것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결과라기보다 나 자신의 말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결과다. 나는 삶들에게 내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

‘용기courage’는 ‘마음coeur’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용기를 지닌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핵심인 마음은 용기의 터전이다. … 용기는 극적인 몸짓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용기는 흔히 작고 후미진 곳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대체로 예언자들이 죽고 나면 그들을 칭송한다. 과연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기꺼이 예언자가 되고자 하는가?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내가 느낀 분위기는 ‘평범함’ 그것이었다. … 여기에는 ‘완벽하고 멋진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 하느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체험으로 확신하는 깨달음이 서려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인간의 애정과 사랑에 의존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누구하고나 벗으로 지내고 싶어했다. 그러기에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사랑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사랑이 부족한 세상을 응시하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존재를 우리 스스로 하찮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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