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15년째 내 건강한 식단’ 본문
‘15년째 내 건강한 식단’
늦은 아침을 준비(?) 한다. 아니다. 차려진 것들을 선택만 하면 된다.
14개 국가에서 온 공부하는 신부님들만 모여 사는 공동체이기에 아침 만은 제 각각 식사 시간이 다르다. 수도원에서 늦잠이 왠 말인가 싶겠지만 형제들 각자가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가 ‘함께’ 정한 규칙이다. 그래서 아침형 인간의 형제는 이른 아침 미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형 인간은 점심식사 전 미사를 참례하면 된다. 사정이 생겨서 공동체 미사에 참례할 수 없어도 걱정할 게 없다. 모두가 성품을 받은 사제들이기에 혼자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다. 사제품을 받아 좋은 점 중 한 가지가 언제 어디서든 미사 집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 식빵 한 조각, 사과 반쪽, 요거트 하나, 오렌지 주스 한 잔의 소박한 식단이다. 수도원에 막 입회해서 시작된 식습관이다보니 거의 15년째 같은 식단이다. 그러고보니 수련원 시절에는 계란 후라이가 있었고, 일본 유학 시절에는 ‘낫또’라는 발효된 된장콩을 아침 마다 먹기도 했다.
막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서는 한 형제가 내 식단을 보더니 “muy sano!”라 감탄한다. 아프리카에서 온 이 형제는 늘 이렇게 유쾌한 말투와 몸짓으로 주위를 깨운다. 방금 전 막 요거트를 한 입 먹다가 ‘차가운’ 감촉에 나도 모르게 ‘오늘은 식단에 온기가 없네’라며 혼자서 볼멘 소리를 내뱉다가 그 형제의 “아주 건강한 식단인데!” 라는 감탄사를 듣고 화들짝 놀라게 된 것이다.
지난 밤 본 인테넷 방송에서 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어느 맛집에서 닭볶음탕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바닦까지 싹 씩 훑어 먹는 것을 보고 내심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5년째 같은 아침을 먹으면서도 ‘온기가 없네, 있네’ 투정 한 번 없다가 오늘은 또 그렇게 괜한 투정을 해 보았나보다.
아니다. 며칠 째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이 밥이 끝난 후 또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4월말 학기가 끝나서 더 이상 수업에 들어갈 일이 없어 좋기는 하지만, 한 학기 강의 노트들을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과제와 레포트 그리고 기말 시험에 이렇게 3주째 매일같이 도서관 출근이다 (‘도서관’이라 해보았자 바로 수도원 공동체 안에 있다). 게다가 학기 중에 읽어 두었던 아티클들을 이번 정리를 위해 또 다시 읽어야 하는 팔자에 더 머리가 무거운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나쁘면 팔다리가 고생한다는데 나 처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머리가 더 고생스럽다. 그 옛날부터 ‘몇 년도에, 누구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그 마지막 결과’까지 2000년 분을 모두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은 다행스러운 것은, 내 공부가 ‘교회사’이다보니 예수님 죽음 이후 (A.D) 교회 역사만(?)을 공부하면 된다. ‘B.C’가 빠진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가!
책상 위에 산적해 있는 자료들 때문에 괜히 심난해 하다가 아침에 읽어 둔 복음 한 구절 떠올려 본다.
“사비오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런데도 너는 아직 나를 모른단 말이냐. 너는 나를 이미 보았고 그래서 나를 안다. 그러니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아 누린다.
고마운 형제, 고마운 말씀, 고마운 나의 하느님 그리고 미안한 15년째 내 건강한 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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