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나는 왜 두려워하는가?'-'두려움'에 대한 단상 본문
'나는 왜 두려워하는가?'-'두려움'에 대한 단상
얼마 전 수도회를 통해 새로운 소임지로 파견을 명령 받았다. 2년간의 스페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처음 1년 간의 여정으로 스페인어를 배우러 왔다가 뜻밖의 기회로 ‘교회사’ 연구까지 하게 되었고,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서툰 외국어 실력으로 대학원 리첸시아 과정에 등록할 수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2년 간의 스페인에서의 특수 연학기는 새로운 배움과 함께 내 자신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성찰 중에 가장 크게 올라 오는 한 '감정'이 있어 그것에 머물러 본다.
스페인에서의 생활 중에 가장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던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이 ‘두려움’은 모든 내 불안함의 원인이었다. 어느 것 하나 이 ‘두려움’과 관계하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새로운 학문도 ‘두려움’이 가장 큰 방해물이었으며, 낯선 곳에서의 삶 역시도 ‘두려움’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두려움’은 그들에게 말을 건네지 못하게 막았고, 이런 저런 경험들 앞에서 나를 거의 100%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려움’들이 올라 올 때를 되돌아보면, 내가 1) 모를 때, 2) 통제할 수 없을 때, 3) 예측 불가능할 때이다. 즉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내려고 했을 때이다. 거기에 ‘내 욕심, 내 욕망’이 더해지면 내 두려움은 절정에 이르고 만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무력감, 이 엄청난 자만심이 나를 자꾸 머뭇거리게 만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조심 조심 살게 한다.
내가 이미 잘 알고 있고, 그 뒤 일어날 일도 예측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면 두려운 감정이 올라 올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집 앞 슈퍼에 갈 때는 아무런 준비 없이 슬리퍼를 질 질 끌고 혼자서도 잘도 간다. 그러나 먼 곳 스페인 바로셀로나 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도시를 잘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 비행기를 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이런 두려움이 올라 올 때, 누군가 벗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가 있었다. 비록 잘 알지도 못하고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내 곁에서 든든한 벗이 함께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에서의 삶은 눈 앞에 산적해 있는 것들을 당장 내 힘으로 어찌해 보려는 조바심에 내 벗인 하느님 그분을 헌신짝 처럼 내 버리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이유로 수도자로 십수년을 살고 있는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 힘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이렇게 두려운 것 천지 투성이다. 처음부터 하느님 그분을 신뢰하고 맡겼다면 그 결과가 설령 실패나 거절 받음 일지라도 그 뒤를 따르는 감정들은 ‘받아들임, 평온, 온유, 잔잔함’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호수 위를 걷다가 빠져버린 베드로의 처지가 이해가 간다. 예수님을 믿고 호수 위로 발을 내딛었다가 얼마쯤 물 위를 걷다보니 그것이 제 힘인양 착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 그것이 아닌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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