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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오오무라(大村) 순례지 본문

매일의 양식

오오무라(大村) 순례지

해피제제 2020. 9. 1. 12:03

1582년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로마를 방문했던 하라 마르틴, 나카우라 쥴리앙, 이토 만쇼, 치치와 미겔 4명의 소년사절단

 

오오무라(大村)는 전국시대 처음으로 불교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1533-1587)의 영지였다. 그는 1563년 바르톨로메오로 세례를 받았고 그 가족들과 가신 그리고 영주민들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이 시기 일본 전체의 가톨릭 신자의 1/2, 6만명 정도가 오오무라의 신자였다. 후에 1580년 스미타다는 조그만 항구였던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맡김으로써 예수회의 선교활동과 포르투칼과의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다. 

 

오오무라 스미타다 바르톨로메오가 1585년 아들 요시아키에게 영주직을 물려주고 말년을 보냈던 저택 터

 

1582년에는 예수회 동인도 순찰사 발리냐노 신부의 설득으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을 서양에 알리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기를 청하면서, 큐슈의 유력 그리스도인 영주인 오오무라 스키타다,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 붕고의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시마바라의 영주)는 그들의 친척과 가신의 자제들을 사절단으로 로마에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1587년 토요토이 히데요시의 '천주교사제 추방령'을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아들 오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1568-1615)가 오오무라의 영주가 되면서 히데요시의 명으로 조선을 침공한 군대의 제1사령관 가토키요마사(加藤清正)의 조언에 따라 다시 불교도로 개종하고 오오무라가(大村家)의 후손들은 가톨릭과 인연을 끊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후 영지 내에 있던 신자들을 박해하고 본경사(本経寺) 경내에 여러 형태의 불교식 거대한 묘지를 조성하여 도쿠가와 막부에 불교도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웅장한 오오무라 가의 묘지석들

 

오오무라 가의 묘지가 있는 본경사 경내 

 

오오무라 家의 웅장한 불교식 비석

 

오오무라 家가 가톨릭 신자였음을 보여 주는 '십자모양 석등'의 존재

 

그런 중에 1657년 오오무라 영지에서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을 한 농부가 신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4년 도쿠가와 막부의 '천주교 금지령' 이후 1637년 시마바라 난(그리스도인들이 일으켰다고 알려진 난으로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37,000명을 본보기로 전멸시킨 사건)을 거치면서 천주교를 박멸했다고 자부하던 도쿠가와 막부는 오오무라 영주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고 영주는 붙잡은 608중 406명을 나가사키, 히라도, 사가, 시마바라 등으로 분산 수용하였다.

 

오오무라에 투옥된 신자 131명은 호코바루에서 처형 후 몸과 몸통을 분리하여 나가사키와 왕래가 빈번했던 가도에 20일간 걸어 두었다.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을 알고 있던 관리는 '목과 몸통'을 따로 묻었다가 3일 후에 다시금 오오무라 바닷가에 버렸다. 

 

1658년 7월 27일 이곳에서 131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되었다.

 

나가사키와 왕래가 빈번했던 가도로 131명의 머리를 걸어 두었던 장소, 지금은 성모자상이 안치되어 있다.

 

쿠비즈카(首塚) 터, 목과 몸통을 분리하여 이곳에는 '목'을 묻어두었다

 

도우즈카(胴塚) 터, 이곳에는 '몸통'을 묻어 두었다.

 

'처자와의 이별 바위', 붙잡힌 그리스도인 가족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헤어졌던 곳

 

순례의 단상

 

몸을 좀 놀려서 땀을 흘려야겠다는 목적으로 떠나 온 불순한(?) 순례길이었다.

처음 오오무라에서의 가톨릭 태동과 발전 그리고 마지막 흔적들을 따라 걸으며

무더운 8월의 퇴약볕처럼 숨이 턱 턱 막히고 어지럽기도 했다.

 

1657년 오오무라 순교 이전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사제와 선교사 그리고 개별 신자들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오무라에서의 순교는 '꾸즈레崩れ'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한 마을 전체를 초토화 시킨 박해였다.

아무래도 1614년 '천주교 금지령'이후에도 몇 십년이 흘러도 끈질기게 흔적을 남기는 그리스도교에

도쿠가와 막부는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마을 전체를 쓸어 버리는 박해를 결정했는지도...

 

순교지들의 한 뼘도 안 되는 그늘 터에 비벼 앉아 나 살겠다고  땀을 닦고 목을 축이고

뒤 늦게서야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면서

그분들의 작은(?) 신앙들 덕분에 

오늘 내가 이곳에 철퍼덕 주저 앉아 기도라고 올릴 수 있게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 남도 알아주지 않은 신앙을 위한 순교처럼 보이지만

또 그렇지 않게 나에게까지 그 목마름, 아픔, 두려움, 약함 그러나 그분을 향한 신앙의 무게를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괜히 그런 생각들에 한 낮 헉 헉 대면서도 다음 순례지로 씩씩하게 나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