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본문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마태 5,43-48
동경대 가톨릭 학생 기도모임에서의 나눔 중에
한 학생이 자신의 '냉담'의 이유를 밝혔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유롭지 못하고 답답하다' 라는 것이다.
자신 뿐만 아니라 열심한 주위 가톨릭 신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열렬히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교회의 가르침, 그 무게에 눌려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덩달아 질식할 것 같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교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거미줄처럼 옥 죄기만 한다면 왜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가?라며
회의감 마저 들게 된다며 답답함을 호소해 온다.
그이의 말도 맞다 싶다.
그리고 그렇게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고맙고 예뻐 보인다.
자신이 신앙하는 하느님에 대해서
아무런 질문도, 의심도 없이 그저 '믿기만' 할 수 있을까
'그냥 믿어'라는 말에 토를 달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아닌 게 아닌가
유아세례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할 때에야 그럴 수 있다 치자
점점 머리가 커가면서 자신이 믿고 따르는 하느님에게 '왜?'라는 질문을,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해 보이는 것들에 '하느님 탓'을 해보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닐런지
그런 까닭에 종교적 맹신의 폐해가, 정체도 모를 이상야릇한 종교가
버젓히 사람들을 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냉담 중인' 학생의 '냉담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왜?'라는 질문들에
오히려 그가 더 하느님 곁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듯 보인다.
한 가지 더,
어느 날 식탁 대화에서의 일이다.
'일본에서 왜 가톨릭이 성장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일본인 수사님의 대답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톨릭의 가르침은 너무 엄격하다.
턱없이 '완벽한 기준의 것들'을 요구한다.
그러니 그 기준에 맞출 수 없는 일본사람들은
가톨릭을 동경하면서도 종교로 삼기를 꺼린다."
그러면서 가톨릭에 비해 별 요구가 없는 불교나 신도를 신봉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 곁에 듣고 계셨던 한 신부님의 해석이 인상에 남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완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하느님의 '완전'은 '완벽함'의 '완전'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기준을 향해 '올라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래로 '내려감'이다.
자신의 약함으로 내려가는 것,
즉 자신의 비참하고 부끄러움으로 감추고 싶은 것들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이 사랑 받고 있음을 깨닫는 것,
어떤 높은 기준들에 맞추기 위해 발버둥 치며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어떤 기준들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약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께섬 말씀하신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뜻이 아닌가'
그래 보인다.
'아래로 내려 가는 완전함'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완전함'
하느님인 예수님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듯이
그리고 다시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듯이
그래서 완전함이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사랑을 다한 그 모습인 것은 아닐까
턱없이 높은 기준들에 마음 고생하고 있는 믿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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