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왜 예수님은 ‘불의한 집사’를 칭찬했을까? 본문
왜 예수님은 ‘불의한 집사’를 칭찬했을까?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루카 16,8
한 달 전부터 수도원 밖의 움직임이 부산스럽다.
평소라면 나가사키 관광객들과 순례객들이 드문 드문 모습을 보이지만
요즘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과 행사 준비 공무원들
그리고 새롭게 공원을 단장하는 공원 관리 공무원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고 있다.
11월 24일 이곳에서 일국의 국가 수반에 해당되는 중요한 인사,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맞이하기 위해 최상의 것들을 제공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아베 정부는 일본 헌법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그래서 정부 예산을 어떤 특별한 종교 행사를 위해 사용할 수 없다 라는 조항도 바꾸어
즉, ‘특별법’을 제정하여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노력 중이다.
오늘 복음을 마주하면서 오래 전부터 가졌던 질문이 다시금 솟았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주인을 속여 먹는 부도덕한 집사를 향해
오히려 주인의 해고 통지에 ‘영리하게 대처했다’ 라며 칭찬을 하고 있을까?
아베의 대한민국을 향한 요 몇 달 간의 행태를 보고
또 이 와중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초대해 이용해 먹으려는 음모(?)를 보면서
예수님의 ‘불의한 집사에 대한 칭찬’에 대한 단서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불의한 집사의 한탄처럼
‘이제까지 주인 덕에 걱정 없이 지냈는데
그깟 남아 도는 것 조금 삥땅을 쳤다고 집사 일을 그만 두라면
이제부터 나는 어찌 먹고 살란 말인가?
이 나이에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그렇다고 빌어먹자니 창피스럽고 그러니 내가 어찌 해야 할까?’
그래서 이 불의한 집사는 머리를 짜내고 짜내어
이제까지 자신이 아는 한에서의 최후의 한 탕,
주인이 빚을 준 사람들의 대출 장부를 조작하기로 결심한다.
앞으로 ‘힘에 부치고 빌어 먹는 창피’를 면하기 위한,
자신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최후의 생존전략을 짜낸 것이다.
그것이 옳은 방법인지, 불의한 방법인지 상관할 처지가 아니다.
무슨 짓을 하든 살아 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방법이
남들의 눈에는 ‘불의하고 옳지 못한 방법’일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그의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옳고 그름에 관계 없이 내가 살아 남기 위한 선택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그 ‘절실한 마음들’을 이해하신 것은 아닐까.
불의한 선택이기는 하겠지만,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는 하겠지만
그렇게라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사람들의 간절함 말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해서라도 살아 남기 위해
그들의 경험과 지식 안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간절함’이 깃든…
예수님이 왜 ‘불의한 집사’를 칭찬을 하셨는지
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낸 그 ‘절실한 마음들’을 미루어 보아서라도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집사들’의 행동에 그분의 ‘자비로움’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왜곡하는 아베도, 혐한을 조장하는 일본 우익들도,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나 좀 봐 달라’고 떼를 쓰는 그이들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살아 남기 위한 ‘가장 최상의 수단’일 테니 말이다.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 현명해지려는’ 우리 모든 노력들이
그래도 그분의 바르고 옳고 선하고 정의로운 가르침이 기준이 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나의 하느님 그분의 도움을 청한다.
바름이신 하느님, 우리의 기준이 아버지 당신이 될 수 있도록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매일의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예수다!” (2) | 2019.12.14 |
---|---|
단 한 명이라도 ‘감사’한 일이다 (0) | 2019.11.13 |
난 네가 수련원 시절에 했던 일을 기억한다 (0) | 2019.10.27 |
나는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왔다 (0) | 2019.10.25 |
수호 천사-“누가 나를 보호합니까?” (0) | 2019.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