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절망 중에 있을 때 본문
절망 중에 있을 때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고요한 성당에서 와락 절망감이 밀려든다.
최근 긴장 중에 있는 형제에 생각이 가 닿자 나도 모르게 이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이다.
사는 데에 별 관계가 없다면 안 보고, 안 부딪치면 될 일이지만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 하고 살아야 하는 공동체 형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그 형제가 공동체 장상이고,
사도직 일터의 책임자라면 이번 생(?)은 완전 망한 것이다.
이 아침 가슴이 먹 먹 해지는 것은 앞으로 이 생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 앞에서는 절대 전투력이 급상승하는 나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은 ‘그냥 해!’라는 말들 앞에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장렬히 전사할지언정 절대 물러설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투력을 상승시키며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80이 넘은 할아버지 신부님이 위태위태한 발걸음으로
아침 미사를 위해 제대상을 차리고 계신다.
방금까지 전투력을 높이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나는
약자에게 약한 내 마음처럼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할아버지 신부님을 도와 제대상을 차리고 미사 전례서를 읽기 좋게 펼쳐 둔다.
신자들 앞에서 오늘의 복음이 어디인지 헤매고 있는 신부님에게
내가 들고 있던 매일미사책을 얼른 건넨다.
전투는 전투고 미사는 미사다.
작은 수도공동체와 사도직장에서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던 할아버지 신부님이
새파랗게 젊은 후배가 사사껀껀 시비를 가려오니 얼굴이 편해 보이지 않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동안 눌려(?) 지내던 다른 할아버지들이
조금씩 당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또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까지 집 안 일을 하는 스텝들이나 사도직장의 직원들 앞에서는
장상의 권위에 직접적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로 우리 둘 만 있을 때, 혹은 공동체 모임에서 공론화 할 뿐이다.
함께 일하는 형제가 장상 형제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면
스텝들이나 직원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는 전투고 장상은 장상이다.
역시 다행스러운 것은
장상인 형제 신부님도 무턱대고 당신 생각대로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형제들의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반대에 부딪치면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이어가기도 한다.
가끔씩 발끈하며 시비를 가리는 새파란 누구 때문에
늘 마음과 몸이 시키는대로 반응하던 할아버지 신부님이
늘그막에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려니
시집살이도 이런 시집살이가 없어 보인다.
사사로움은 사사로움이고 공적인 것은 공적인 것이다.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현재의 상황에서도
이 아침 스치듯 절망스러운 상황이 그다지 절망스럽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절망 가운데 늘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떤 어둠 중에 있을지라도
그 어둠 너머에는 늘 나의 하느님 그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기를
나의 어둠과 절망 중에도 늘 그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기를
오늘도 나의 하느님 그분의 도움을 청해 본다.
빛이신 하느님, 제가 절망 중에도 늘 당신을 희망하게 하소서.
덧붙여서,
“왜 미성숙한 형제가 원장이 되는 것입니까?”
어느 날 한 젊은 예수회원이 베드로 파브르 성인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성인이 대답했다.
“당신이 서원했던 ‘순명서원’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왜 지금 이 순간 파브르 성인의 이 말씀이 떠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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