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본문
1독서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기 3,1-23)
복음말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단상
사람은 저마다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으로 다툰다.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정의가 이루어지면 가정은, 세상은
저절로 평화로워질 거라 말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내 정의와 평화에 맞게 변해 줄 것을 요구한다.
숫제 강요하기까지 한다.
항상 다른 사람이 변해야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모른다.
그저 그이들을 반대하고 이해해주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이 서운할 뿐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리자며 그 서운함을 토로한다.
반면 1독서의 욥은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할 뿐이다.
분명 모든 것을 앗아간 하느님을(?) 저주할 만도 하지만
오히려 자기가 태어난 날과 그 죽지 못함을 통탄할 뿐이다.
어디에도 하느님을 향한 원망은 묻어 있지 않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라며 반문할 뿐이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그의 입술에도 서운함이 묻어나지만
이는 결코 원망과 저주의 말이 아니다.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의 언어다.
나는 욥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모든 것을 다 앗아간)
오히려 자기 태어난 날을 원망할 뿐
그것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는지
그 신뢰와 믿음이 어떻게 가능한지....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기 3,1-23)
복음말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단상
사람은 저마다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으로 다툰다.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정의가 이루어지면 가정은, 세상은
저절로 평화로워질 거라 말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내 정의와 평화에 맞게 변해 줄 것을 요구한다.
숫제 강요하기까지 한다.
항상 다른 사람이 변해야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모른다.
그저 그이들을 반대하고 이해해주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이 서운할 뿐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리자며 그 서운함을 토로한다.
반면 1독서의 욥은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할 뿐이다.
분명 모든 것을 앗아간 하느님을(?) 저주할 만도 하지만
오히려 자기가 태어난 날과 그 죽지 못함을 통탄할 뿐이다.
어디에도 하느님을 향한 원망은 묻어 있지 않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라며 반문할 뿐이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그의 입술에도 서운함이 묻어나지만
이는 결코 원망과 저주의 말이 아니다.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의 언어다.
나는 욥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모든 것을 다 앗아간)
오히려 자기 태어난 날을 원망할 뿐
그것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는지
그 신뢰와 믿음이 어떻게 가능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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