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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나는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은 ‘평화예식’ 시간에 서로를 향해 ‘평화를 빕니다’라며 한 목소리로 주님의 평화를 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예수님이 ‘평화의 사도’임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복음 말씀을 듣게 되면 퍽이나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니…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살아 있는 하느님’이다. ‘메시아’이며 우리의 ‘구원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신앙인들의 이 세상살이 모델과 기준이 된다. 그분의 짧은 공생활에서 보여 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

수호 천사-“누가 나를 보호합니까?”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어느 낯선 곳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의 주인은 나를 정중히 맞아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주인은 나에게 서둘러 떠나 달라고 그런다. 해서 나는 그에게 ‘나를 도와 줄 사람이 누굽니까?’ 라고 물었는데 때 마침 핸드폰 알람이 울리며 눈을 뜨게 되었다. 잠을 막 깨어 비몽사몽 간에 나는 계속 해서 물었다. “누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멀리서 들려 온다 ‘나의 하느님, 그분의 천사가!’ 오늘 공동체 강론을 하기 위해 전 날 잠 자리에 들기 전 읽었던 복음말씀이 간 밤 꿈 자리에까지 따라 들어 왔는가 보다 그래서 나는 잠결에도 ‘누가 나를 보호해 줍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나 싶다. 그래 보인다..

친절함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을 방문하고 일본 삶터로 돌아오니 다짜고짜 박물관 매니저가 하소연을 해온다. 9월달 '26성인(聖人) 기념성당'에서의 한국인 성지순례단의 미사 예약이 단 한 건도 없단다. 요즘 한일관계가 계속해서 악화 되고 있음은 미디어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민간차원의 교류까지 이렇게 온도차가 확연하게 날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단다. 그이의 투정에도 이해가 간다. 실제로 큐슈 나가사키의 26성인 기념박물관 방문자 80%가 한국에서 오는 순례자들이다. 유럽에서 일본으로 천주교를 전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1549년 8월, 성인이 처음 발걸음을 내딛은 큐슈의 가고시마를 비롯해, 히라도, 야마구치, 오이타, 교토 등을 순례 하기도 하고,..

산상수훈의 ‘행복한 사람들’에 대한 단상 신학원 공동체 미사 주례에 딱 강론까지 겹쳤다. 오랜만에 방문해서 마음 편히 먹고 놀며(?) 손님처럼 머물러 있다가 갑자기 빵꾸가 난 공동체 미사에 땜빵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오늘 복음말씀이 예수님의 산 위에서의 ‘행복선언’이다. 또 공교로운 것은 나는 이 ‘행복하여라’의 가르침을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그분께 새롭게 배워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 일명 ‘까미노’는 두 종류의 순례 증명서를 발급한다. 하나는 ‘스포츠용’, 그리고 또 하나는 ‘종교용’이다. 예수의 제자 야고보 성인(산티아고)이 묻혀있는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 무덤은 옛 적 예수의 제자 성 야고보의 무덤을 찾는 성지 순례의 의미와 함께 종교적인 색채를 걷어 낸, 현대의 스포츠를 ..

‘친일파’와 ‘지한파’의 차이 오랜만에 머물고 있는 신학원 공동체에서 가끔씩 수도원으로 봉사를 오시는 근처 신자분의 급 고백(?)을 듣게 되었다. “신부님? 저는 처음에 다른 수사님들이 사비오 신부님을 ‘친일파’ 신부님이라고 이야기해서 조금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라고 한다. 수도회 입회 동기이자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형제 수사님이 자매님이 봉사 나가시는 신학원 공동체에 살고 있고 동기 신부님은 내가 일본에 대해 조금이라도 옹호(?)라도 할라치면 “이 친일파야!’ 라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나를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내 삶의 괘적을 전혀 알지 못하는 봉사 자매님에게는 내 동기 신부님의 농담처럼 부르는 그 표현이 ‘오죽 친일적이면 동기 신부님 마저 그 신부님을 “친일파”라고 부를까’..

사랑이 식는 것인가? “신부님! 어디 안 나가세요?” 스페인으로 일본으로 파견 받았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왔는데도 밥 시간이 되면 꼭 꼭 자리를 지키는 내 모습을 보고 후배 수사님이 ‘그렇게 갈 데가 없냐(?)’는 듯이 말을 걸어 온다. 그러고 보니 어디 마땅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부모님은 뭐 그리 급하셨는지 서둘러 하늘 나라로 떠나셨고 손주들을 키우셨던 할머니 마저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그분들 곁으로 가셨으니 이제 ‘본가’라고는 남아 있지 않다. 시골(?)에 큰고모님과 누님 가족이 살고 있지만 ‘조카 신부님이 왔다’며 80이 되신 할머니(?)가 쉴 틈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도 부담스럽고 누님과 동생의 아들과 딸들이 엉겨붙는 것도 어느 때부턴가 몸이 부대껴 조카들을 이용(?)해 ‘자고 가라’며 붙잡는..

사제들은 누구에게서 배울까? 앞서 영성체를 나선 학생이 성체(聖体)를 바닥에 떨어 뜨렸다. 그것을 주워 얼른 영(領)하지 않고 자리에 돌아가더니 슬며시 구석 자리에 내려 놓는다. 뒤 따르던 한 자매님이 평소 잘 알던 학생이라 조심스레 묻는다. “왜 성체를 영(領)하지 않고 여기에 두었어?” 학생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라 더러워서요.” 한다. 신심 깊은 자매님은 오지랖 넓게도(자매님 표현이다) “그럼 내가 영(領)해도 될까?”하고 학생의 허락을 득하고 성체를 영했다. 아직 어린 학생은 ‘성체(聖体), 예수님의 몸’의 의미와 신심이 그만큼 자라지 못해서 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바닥에 떨어진 성체가 더러운 것이 아님을 당신의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성체를 나누어..

하느님을 닮고 싶은 선한 마음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한 눈 팔지 않고 가족을 위해, 또 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성실히 살아왔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생기면 늘 내 잘못이고 내 탓이다. 아마도 하느님 그분 보시기에 ‘더 괜찮은 내 모습,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그분을 닮고 싶은’ 선한 마음 때문이리라. 그러니 늘 부족하고 죄 투성이 내 모습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 보인다. 아무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막 나가더라도 하느님을 딱 빼다 박은 우리들은 그분 선함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니 늘 실수투성이오 ‘죄 많은’ 우리 모습이지만 그래도 ‘더 괜찮은 그분 모습’으로 나아가도록 창조하신 그분을 신뢰하며 오늘 베드로 사도의..